부끄러운 고백

가톨릭부산 2015.11.02 16:10 조회 수 : 22

호수 2060호 2010.08.01 
글쓴이 하창식 프란치스코 

부끄러운 고백

하창식 (프란치스코) 수필가 Email; csha@pnu.edu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난 날을 셈해 보니 올해로 만 30년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 여정이라고 배웠다. 세상의 온갖 무거운 짐은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방황하던 젊은 시절. 성당에 첫 발을 내딛던 날,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였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깊은 평화와 함께. 성모님을 통해서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내 신앙 생활을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가 지나 온 걸음걸음마다 나와 함께 하신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세속에 부대끼며 그저 하루하루 살아 온 삶이다. 넘치는 은총으로 거듭 난 자신이건만, 이웃들 앞에서 성호 긋는 용기조차 갖지 못했다. 무늬만 신자였을 뿐, 생각과 말과 행동 어디에도 가톨릭 신자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채로 2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던 나였다. 하느님은 이런 나를 기묘한 방법으로 일깨우셨다. 

10여 년 전, 직장 일로 다른 지방에 있던 어떤 분을 만나러 갔었다. 그 분의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벽면에 걸린 십자고상이 눈에 띄었다. 순간 내 머리를 쇠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내 머리를 때렸던 것이 쇠망치가 아니라 성령의 망치였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다. 당연히 자랑해야 할 십자가였다. 그러지 못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 곳을 다녀 온 다음 날, 내 사무실 벽면에 십자고상을 걸었다. 그날 이후 자신은 물론, 내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그지없는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느낀다. 

어디 그뿐이랴. 교인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식사 때 성호를 그을 수가 없었다. 남들이 볼까봐서다. 가슴 언저리에 가로 세로 1 cm 정도의 작은 성호로 기도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직장 동료 한 사람과 식사를 할 때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가 나에게 일갈하였다. “성당 다닌다는 사람이 그게 무언가? 기도를 하려면 똑똑히 해야지.” 그 순간 또 한 번 성령의 망치가 내 머리를 세차게 내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이후 어깨 넓이만큼 큰 십자성호를 긋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영세한 지 20년이 지나서다. 일상 속에서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뜻을 나타내고자 애쓰시는 주님이시다. 그런데도, 그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번번이 세속의 삶으로 허둥거리는 못난 자신이 부끄럽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제게 지혜를 주소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내내 당신의 뜻 헤아릴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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