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장갑 한 짝

가톨릭부산 2015.11.05 09:01 조회 수 : 130

호수 2215호 2013.05.12 
글쓴이 정경수 대건안드레아 

잃어버린 장갑 한 짝

정경수 대건안드레아 / 수필가, su303@hanmail.net

고요한 아침이 골짜기의 맑은 물소리와 뭇 새들의 지저귐으로 부산하다. 조용히 아침을 즐기던 장끼가 바로 눈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내방객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푸드덕 건너편 골짜기로 줄행랑을 놓는다. 나도 덩달아 놀라 한동안 망연하게 서 있는다. 아침 햇살에 연둣빛 숲이 황홀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상할 겨를이 없이 발밑을 뚫어지게 살피며 걷는다. 어제 오후, 산을 다 내려와서 보니 오른쪽 장갑이 없어졌다. 길이 꺾이는 길목 부근에서 전화를 받느라 벗었던 것 같은데 급히 내려오느라 떨어뜨린 모양이다. 오래 쓰던 것이라 짝을 잃은 한쪽이 외롭다 여겨진다. 뒤돌아 몇 걸음 오르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날이 저문 데다 내일 아침 일찍 오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발길을 되돌렸던 것이다.

조금 전 떠오른 햇살을 등으로 받으면서 어제 내려온 길을 따라 오르며, 뚫어지게 여기저기를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 길목에서 다시 돌아내려 오면서 자세히 살핀다. 눈은 발아래를 보지만 침묵 가운데 온갖 생각으로 범벅이 된다. 

문득 ‘간디의 신발 한 짝’이 떠올랐다. 벗겨진 신발 한 짝. 기차는 이미 달리고, 간디는 한 짝 신발마저 벗어서 떨어진 신발 쪽으로 던진다. “누군가 저 신발을 줍는다면 두 쪽이 다 있어야 신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의아해하는 동행인에게 한 말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로 피폐해진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젊은 시절 간디의 사랑이 담긴 한 일화이다. 몸에 배어 있는 철학이 없고 서는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인도의 성자라고 칭송받지 않는가?

그런데 이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이 떠올랐다. 하나뿐인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랑. 온갖 박해에도 의연하게 대처하시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의 힘이 되어주신 분. 미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과 실천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신 분. 부활하고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나는 잃어버린 한 짝의 장갑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데, 간디는 가진 반쪽마저 던져 주었고,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다 감싸 안으면서 생명을 던지셨으니 나의 속됨을 자책해 본다. 

장갑은 찾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참사랑을 느끼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산을 내려가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햇살에 반사된 신록의 싱그러움이, 부활 시기를 보내는 이 아침에 더욱 생명으로 다가오고…….

호수 제목 글쓴이
2215호 2013.05.12  잃어버린 장갑 한 짝 정경수 대건안드레아 
2216호 2013.05.19  말의 비밀 김상진 요한 
2217호 2013.05.26  산티아고 가는 길 이동화 신부 
2218호 2013.06.02  푸른 빛 안고 순례하시는 어머니 김기영 신부 
2219호 2013.06.09  불리고 싶은 이름 정재분 아가다 
2220호 2013.06.16  공세리 성지를 다녀와서 박주영 첼레스티노 
2221호 2013.06.23  막힘이 없이 잘 통해야 박주미 막달레나 
2222호 2013.06.30  그 밤, 주님의 집으로 초대받은 이 김기영 신부 
2223호 2013.07.07  감자 꽃이 피었습니다 박옥위 데레사 
2224호 2013.07.14  천국 모의고사 탁은수 베드로 
2225호 2013.07.21  노동인권교육으로 노동(자)을 알자. 김광돈 요셉 
2226호 2013.07.28  구원의 초대는 소리 없이 김기영 신부 
2227호 2013.08.04  수호천사와 데이트하는 날 장정애 마리아고레티 
2228호 2013.08.11  텃밭에서 만난 하느님 김상진 요한 
2229호 2013.08.15  하느님 창조의 신비, 별들의 속삭임 김검회 엘리사벳 
2230호 2013.08.18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 김영일 바오로 
2231호 2013.08.25  안다는 것 장영희 요한 
2233호 2013.09.08  미사 한 대의 무게 박주영 첼레스티노 
2233호 2013.09.08  내 몸의 중심은 ‘아픈 곳’ 이동화 신부 
2234호 2013.09.15  천사를 데려오셨네요 김기영 신부 
색칠하며묵상하기
공동의집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