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신 혜진이를 기억하며

가톨릭부산 2022.06.02 10:51 조회 수 : 18

호수 2708호 2022. 6. 5 
글쓴이 박선정 헬레나 
스승이신 혜진이를 기억하며

 
 
박선정 헬레나 / 남천성당 · 인문학당 달리 소장
whitenoise99@hanmail.net

 
   혜진이의 머리는 몸보다 훨씬 컸다. 선천적으로 ‘수두증’이라고 불리는 병을 갖고 태어난 아기였다. 뇌를 보호하는 ‘뇌척수액’이 순환 후 배출되지 않고 계속 남으면서 오히려 뇌는 물론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린 것이었다. 아기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혜진이는 포대기에 싸인 채 수녀님들이 돌보는 ‘소화영아재활원’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
 
   내가 간호대학에 입학하던 1989년,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한마음한몸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셨다. 내가 당신들보다 더 낫다거나 더 가졌으니 베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내가 드리기도 하고 그분들이 갖고 있는 것을 내가 받기도 하는 ‘관계’였다. 그것은 ‘함께 맞는 비’의 김수환 추기경님 버전이었다. 내 우산을 접고 잠시라도 당신이 맞고 있는 비를 함께 맞겠다는 것이다.
 
   혜진이는 머리의 무게로 인해 목이 꺾어질 수 있는 아기였다. 그러니, 간호대생이던 나를 보자마자 재활원 수녀님은 얼씨구나 혜진이부터 내 품에 안겨 주셨고, 그렇게 나는 ‘진이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돌도 안 된 혜진이의 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성인 머리 크기 이상으로 커져갔다. 눈꺼풀이 당겨 올라가면서 눈조차 감지 못했다. 그러니 안구 건조를 막기 위해 수시로 거즈에 물을 적셔 눈을 덮어 주어야 했다. 곁에서 자던 내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혜진이의 눈을 덮고 있던 거즈를 걷는 것이었다. 거즈를 들어 올리면 그곳에는 밤새 감지 못한 채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을 까만 눈동자가 있었다. 거기에는 온 힘을 다해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 천사가 있었다.
 
   혜진이는 ‘불쌍한’ 아기가 아니었다. 소위 SKY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못한 것들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의미,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의 의미, ‘건강하다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나아가서 ‘행복’과 ‘불행’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다. 평가하고 심판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함께 미소를 나누는 ‘관계’였다. 혜진이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예수님은 여전히 혜진이의 형상으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계시더라. 그러니, 잘 둘러보고 꼭 그분을 만나보시라. ‘사랑’을 최고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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