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 불을 지피며
박선정 헬레나 / 남천성당 · 인문학당 달리 소장
whitenoise99@hanmail.net
내가 자랐던 시골집에는 정지라 불리던 부엌과 아궁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시골집에 갈 때면 아궁이에 불부터 지핀다. 혼자서 버텨주는 오래된 집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성냥 하나를 켜서 마른 짚에 불을 붙인 후 아궁이 속에 넣고, 잘 마른 잔가지들을 조심스레 그 위에 얹는다. 그리고는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면서 불이 잔가지에 옮겨붙도록 조심스레 부채질을 한다. 잔가지에 불이 붙으면 그제야 나무 장작을 아주 조심스레 넣는다. 이때 장작의 무게가 잔가지의 불꽃을 꺼뜨릴 정도가 되어선 안 된다. 마치 깃털을 얹은 듯 가볍게 느껴져야만 서로 불을 나눠 갖는다. 그렇게 옮겨붙은 장작불은 아궁이 안에서 함께 춤을 추며 가마솥을 데우고 아궁이 속과 구들장을 데우고 방을 데워 온 집을 따뜻하게 만든다. 얼마 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고 일부러 시골집엘 들렀다. 흙과 돌과 나무로 된 혼자 남겨진 이 낡은 집이 잦은 비에 혹시라도 힘을 잃고 주저앉아버릴까 염려되어서다. 그런데 좀처럼 불길이 살아나질 않았다. 애써 종이에 불을 붙여 잔가지를 얹으면 어느새 꺼져버리고, 잔가지에 용케 불이 붙었다 싶어 장작을 얹으면 또다시 힘없이 꺼져 버렸다. 아궁이 안을 들여다보며 부채질을 하느라 눈물 콧물이 뚝뚝 떨어지고 연기로 목이 아팠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참을 아궁이와 불과 장작을 바라보며 애를 태우다 그제야 알았다. 한참 동안 온기가 없었던 아궁이 안은 더없이 차고 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니 불을 제대로 지피려면 우선 아궁이 안의 차고 습한 기운부터 달래야 했던 것이다.
사람도 아궁이 같다. 따뜻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 어둡고 차가울 수 있다. 이때의 ‘그’는 내 이웃일 수도, 내 가족일 수도, 그리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이러한 그를 위해서는 한층 더 부드러운 인내의 사랑이 요구된다. 그러니, 왜 빨리 불씨가 살아나지 않느냐며 불 지피기를 금세 포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 이처럼 사랑은 나와 세상을 데우기 위해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며 눈물 콧물 흘려가며 부채질하는 낮춤이자 정성이자 노력일 것이다. 사랑이 하찮은 것처럼 무시되는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에서 다시금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 되길 기도한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