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이윤벽 프란치스코 신부 / 성안성당 주임
예수님을 두고, 사고 치지 않고 반듯하게 잘 살아가는 길을 조목조목 가르쳐 주는 윤리선생이나 주일학교 교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신원과 활동에 대해 치명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분의 질문과 대답은 늘,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 하느님을 포함해서 나 아닌 타자에게는 관심을 둘 여지도 없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지나치다 느껴질 만큼 근원적이다. 오늘 복음 말씀만 봐도, 그분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근원적인 답을 들려주신다. 타자에 대한 배려는 없어도 그저 열심히, 죄짓지 않고 제 앞가림만 잘하고 살면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하고 싶은 우리의 생각에 근원적으로 도전하신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두 가지 비밀을 알려준다.
첫째,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 얽매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현실 너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는 삶의 길 - 서로 배려하고 약자를 보살피며 가난한 이의 고통에 책임감을 느끼며 동행하는 이 길은, 프란치스코 교황님 표현대로 무한경쟁으로 말미암아 ‘무관심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세상에서(람페두사 난민촌 강론 중) 멀고 아득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대붕’ 이야기에서처럼, 제 이해가 좁음은 알지 못하고 턱없이 큼(혹은 근원적임)을 비웃는 매미와 비둘기에게 대붕의 길은 좁고 험하고 무엇보다 쓸모없을 따름이다.
둘째, “지금은 꼴찌이지만 첫째가 되는 이가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가 있다”는 말씀 역시 매미와 비둘기에게는 마치 ‘네모난 원’이란 말처럼 모순되게만 들린다. 예수님 말씀은 삶의 체험 가장 깊은 곳에서 솟는 역설이고, 불편한 진리이다. 그분께서 온통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말은 철학적, 신학적, 윤리적 견지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성당에 열심히 나오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식의 신앙으로는 아득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대붕’처럼 도를 터야만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줄곧 가난한 이들, ‘꼴찌’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일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시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교회 안에 가난한 형제들이 설 자리가 없는 순간이 교회의 심각한 위기라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 성당 옆자리를 둘러보자. 우리 본당에 가난한 형제들이 많다면, 그만큼 우리 본당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많다는 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