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홍경완 메데리코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며칠째 골똘히 하늘만 쳐다보았다. 오늘 제1독서의 갈릴래아 제자들처럼. 어디가 하늘이고, 무엇이 하늘인지, 우리 주님께선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곳에 도달하셨는지. 세상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겠다 약속하시고선 왜 하늘로 오르셨는지. 그런데 하늘을 생각하면 할수록, 하늘을 쳐다보면 볼수록 모르는 것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더 줄어들수록,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은 점점 더 모르는 분이 되어갔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했던 질책성 발언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상상력을 총동원해 그려보는 하늘, 하느님 나라, 하느님에 대한 많은 물음들, 인간의 언어 안으로 그분을 집어넣으려는 온갖 시도들을 그만두라는 말씀처럼 들린다. 이런 노력들이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멀리 계신 분으로, 저 너머로 쫓아내 버리기 때문이리라. 실상 하늘을 쳐다보면 볼수록 하느님은 더 낯선 분, 모르는 분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어본들 거기선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하늘은 원래 그렇다. 그런 것이 하늘이다.
이제 그만 묻자. 묻기를 그만두고 우선은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을 그냥 신뢰해 보자. 그분은 그리 멀리 가신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노라고. 이제 하늘은 그만 쳐다보고, 그 대신 땅을 바라보자. 진짜로 그분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곳이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땅에 충실할 노릇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머리 대신 가슴으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그분은 발견된다. 그러고 보니 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는 천사의 질책은, 이제 땅을 바라보라는 애정 어린 충고로 들린다. 하긴 인간은 본디 그 기원부터 땅의 존재이다. 땅을 가꾸며 봉사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이다. 이름부터 땅이란 말에서 유래한 아담이요 호모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땅에 머무는 지금 여기에서 그분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 더 우선이다. 이 땅 위에서, 유언으로 남겨주신 말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고, 계명을 지키도록 애쓰고 가르치라는 말씀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세상을 가꾸어 가는 게 더 우선이다. 괜히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믿으며 땅을 가꿀 일이다.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시겠노라 약속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