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일은 인간의 것입니다. 인간만이 질문을 던지며 그 까닭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냥은 받아들이기 싫다는, 수용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고 싶다는 인간 의지의 강력한 표현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믿음에 대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의심하면 불신앙이 더 커질 듯 보이지만, 실은 질문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 든든한 토대가 되어 제대로 된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이끌어 줍니다.
신앙은 그 마지막 자리에선 어떤 의심이나 질문도 필요 없는, 심지어 믿는다는 말조차 무의미한 *지복직관의 순수가 자리하고 있을 터이지만, 그건 마지막에나 일어날 바라마지않는 일이고, 그리로 향하는 길 위에서는 늘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는 작업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가르치고 계시듯, 신앙과 지성, 믿음과 앎은 하느님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멈춰질 때 신앙은 쉬 맹신과 광신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질문이 멈춰진 건강하지 못한 신앙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해로운지 신천지를 비롯한 유사종교들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하고자 하면 질문을 던져야 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는 ‘불신앙의 대명사’가 아니라 ‘질문하는 신앙인의 표양’입니다.
토마스는 알고 싶었습니다. 부활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은 백주에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 누구도 모를 수 없으나, 부활은 하느님의 손으로 하신 일이기에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이 질문의 끝에 나오는 황홀하고도 찬란한 고백입니다. 질문하는 사람 토마스는 난처한 질문을 통해 한 단계 너머로 도약합니다. 감각적 지각을 넘어선 또 다른 앎이 있음을 온몸으로 체득합니다. 질문 때문에 가능해진 도약이고, 질문으로 새롭게 열리게 된 지평입니다.
부활이 말해주는 신비는 예수님처럼 살면, 죽음도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죽이는 일이 가능하다는 가르침, 그 엄청난 신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오늘 첫 독서가 그 변화를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가능해집니다. 두 번째 독서가 말해주듯 부활은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인생관도 바꿔 놓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6세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라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말씀입니다.
*지복직관 :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直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지극히 복된 상태(至福)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의인을 하느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 안으로 끌어들인 상태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