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과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같은 병을 앓거나 같은 입장이 되어보면 그 처지를 알게 되어 이해가 빠르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해는 남편이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내가 남편의 입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직장의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 며느리와 시부모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이 되어주면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선포하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분명 사랑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뼈 빠지게 사랑하지도 않지만 사랑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문턱이 닳도록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 필요가 사라지면 주님을 찾아 나서지 않는 핑계가 백 개는 나올 것입니다. 날씨 탓, 건강 탓, 전염병 탓, 보기 싫은 사람 탓 등으로 주님을 찾고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이렇게 많습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이방인을 내치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합니다. 이유는 자신들도 종살이의 서러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는 엄청나게 정성을 쏟고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경우를 봅니다. 코로나19로 이웃 간의 소통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제주도에는 많은 사람이 휴가를 가고 있습니다. 부모를 찾아보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십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돌보지 않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봉사도 하고 여러 신심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정작 가족은 외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분명 말할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자기를 낳아 준 부모부터 자기 몸같이 돌본다면 외롭고 쓸쓸히 고독사하는 노인이 이 사회에 이렇게 많지는 않겠지요.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굳건한 신앙을 가지길 청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내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서 모두 영생에 나아갑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