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꽤 오랜 시간 엄마가 집을 비울 때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란다 창을 다 닫아걸어도 창문 흔들리는 소리가 꽤나 요란한 밤.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형아~ 무섭다~” 동생의 칭얼거림에 애써 담담한 척... “무섭긴 뭐가 무섭노~ 형아가 안 무섭게 해 줄게.”라고 허세를 부리고는 텔레비전 소리를 높이고, 온 집에 불이란 불은 다 켜놓으며 무서운 내 마음을 다스리지만, 텔레비전 소리도 온 집에 켜놓은 불빛도 두려움을 없애주진 못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요란한 창문 소리와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를 뚫고 ‘딩동~’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날쌘 동생이 후다닥 뛰어나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묻습니다. “누구세요?” 그러자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응, 엄마~”
“응, 엄마~” 이 가녀린 여성의 한마디는 창문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만듭니다. 이 가녀린 여성의 한마디는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로도, 온 집안을 밝혀둔 불빛으로도 없애지 못했던 두려움을 온전히 사그라들게 만듭니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그런 존재지요.
왜 아이들은 “응, 엄마~” 이 한마디에 모든 두려움을 잊을까요? 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요란한 밤’이라는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왜 엄마가 있으면 괜찮아지는 걸까요?
‘엄마와 아이들 간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 그 존재가 지금 내 곁에 있기에, 상황은 그대로지만,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엄마’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가 거센 바람이 부냐 고요하냐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니, 그것이 채워지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관계성’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생각해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 내가 아버지의 뜻을 살아낸다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가?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도, 언제나 그랬듯 ‘요란한 밤’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르려 애쓴다면, 우리 영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닫힌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딩동~ 응, 엄마~”라고 해주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