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거나 “말을 듣지 않는다.”라고 말을 합니다. 학생이 스승의 말을 안 듣고, 자식이 부모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요즘 어른들의 가르침에는 힘이 없고 권위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의 내용은 전해주고 있지 않지만, 권위가 있어 몹시 놀랐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참 권위의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의 모습이 어떠했을까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는, 먼저 철저하게 ‘사람을 율법 해석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 27)라고 하신 말씀에서 확인되듯이, 사람을 중심으로 삼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기쁨과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가슴에 와 닿는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논리에 얽매여 점점 율법을 비인간화한 율법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선’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흑과 백은 서로 대비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거룩함은 추함을, 선함은 악함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선함이 없다면 악함을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절대적인 선함에 바탕을 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더러운 영은 회당 안에서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악에 대한 선의 즉각적인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현실을 제대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는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비하면, 정말 힘이 있고 권위가 있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는 ‘말과 행동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고(마태 23, 1∼3) 율법학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말로서 이루어진 가르침이 온전히 뿌리를 내리는 것은 바로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실천적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부와 권력만 향해 달려가고 있고, 참된 힘과 권위가 사라져 가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또한 주님처럼 권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