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ㄱㄷ)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대해 “적습니까?”라는 ‘수량’의 질문에, “좁은 문”이라고 ‘협소한 관문’으로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우선 “구원(救援)”이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구해져야 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답답하고, 어렵고, 힘들고, 아프고, 죽을 것 같은 ‘현실의 한계상황’, 우리 인간들이 어찌할 수 없는 그 각박한 현실에 대해 인식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구해주십사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와 함께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 뜻을 따라 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할 때 이루어지는 것. 이 ‘구원’의 다른 이름들은 ‘자유’, ‘해방’, ‘생명의 삶’, ‘창조질서의 회복’, ‘하느님 나라’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구원으로 가는 문이 좁기는 하지만 그 문은 하느님을 찾고 선택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는 문임을 우리는 오늘 확인합니다. 이는 하느님과 가까이 함께한다고 자부하는 이들 특히 자신들이 선택받았다고 믿는 유다인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동서남북, 사방팔방,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라고 ‘구원의 보편성’을 알려주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따라 하느님 시선으로, 하느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 우리가 헝클어버린 세상 창조질서를 다시 회복시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가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