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계시는 예수님
배상복 이냐시오 신부 / 좌동성당 주임
이미 더위가 다가왔지만 일 년 열두 달을 계절별로 구분하자면 6월은 여름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겨우내 죽었던 생명체들이 되살아나 생명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눅눅한 습기와 시루 속 같은 더위에 모기와 벌레 등 각종 물것들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불편한 계절입니다. 이렇게 생명이 왕성한 시기에 오늘 예수님은 죽은 젊은이를 되살리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만 전해 오는데, 제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가 행한 소생이적사화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식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과부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울지 마라’고 하시며 관에 손을 대십니다.
우리 민족도 죽은 사람에 대한 터부가 있는데 유대인들도 죽은 사람을 만질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이에게 몸이 닿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율법을 넘어서서 인간이 겪는 슬픔과 고통의 한가운데로 가신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 고통의 끝이면서 절정입니다. 이 고통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기에 슬픔과 고통을 겪는 이에게 아무리 심오한 논리를 편다 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적사화도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에만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보아야 할 바를 보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아들이 되살아나고 그래서 목놓아 울던 어머니가 다시 기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큰일을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날 되살아났던 젊은이는 얼마쯤 더 살다가 다시 죽었을 것이고 어머니의 기쁨도 세월과 함께 바래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적현상만이 아니라, 이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장례와 관련하여 어느 종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레지오가 활성화된 것은 장례와 관련하여 기도하고 봉사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장례봉사와 기도를 통하여,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심을 믿고 다시 일어날 수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