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한 사람의 죽음과 소생에 관련된 여러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여겼던 가족들이 질병으로 한 형제를 잃은 과정에서 자신들의 든든한 뒷배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항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마르타의 항변은 곤경과 위기에 처해서 어쩔 줄 모르며 좌절하고 분노할 때 일어나는 원망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든, 하느님이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예수님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남매들이 기대했던 도움은 예수님의 특별한 치유능력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전능하신 모습이 예수님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발병과 죽음, 장례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얼른 뛰어들기는커녕 그저 묵묵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러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셔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라자로를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진하게 느낍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여깁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와 소생하는 장면은 예수님의 곡진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런 결말입니다. 그러기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시련과 고통을 겪을 때, 예수님은 멀리 계시고 무심하게 침묵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내가 겪는 모든 삶의 국면에 깊이 동참하신다고 예수님의 눈물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사태에 처할 때, 예수님을 찾기보다는 다른 존재나 수단을 먼저 떠올리는 듯합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견해, 유능한 ‘대화전문 인공지능’(챗지피티)의 판단을 구하거나 심지어 점집을 찾기도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는 도우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나에게 정말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시는 분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위해 우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같이 웃고 같이 우는 사이를 이뤄가는 것이 우리가 평생 누리며 간직해야할 믿음의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