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없는 집, 담장 없는 마당

가톨릭부산 2018.09.27 10:12 조회 수 : 198

호수 2508호 2018.09.30 
글쓴이 김준한 신부 

문 없는 집, 담장 없는 마당
 

김준한 신부 / 감물생태학습관장
 

   9월 순교자성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순교(殉敎)라는 것이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마지막 순간의 결단으로 단박에 도달하는 은총이 아닌 만큼, 치열하고 뜨거운 일상의 노고가 없다면 그 영광스러우면서도 다디단 승리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도 폭염의 계절에 힘겨우면서도 정직한 땀을 흘리며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온 들판에 알곡이 영글고 벌레들도 땅속으로 들어가며 겨울 준비를 하는 추분(秋分)도 지나고, 추분에 내려가지 못한 제비가 마지막 채비를 차려 강남으로 가고 북쪽에서는 기러기 떼가 내려오는 한로(寒露)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계절, 우리의 한해살이도 조금씩 여미며 마음 깊이 속을 채워가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적 영성생활도 외적인 이웃, 특별히 가난한 이와의 관계와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자고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잠언 25,21)고 했거늘, 편을 가르고 오히려 관계를 냉정하게만 만들 규정에 연연하게 된다면, 불구자의 손, 절름발이의 발, 외눈박이의 눈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살피기도 전에 교회의 운영과 자신의 계획에 맞춰 사람도 일도 재단한다면, 어느 누가 거기에 남겠습니까? 예법에도 서툴고, 말투도 어눌하며, 딱히 주목할만한 일 하나 제대로 치러내지 못할 평범한 위인의 존재가 교회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저희를 따르는 사람”(마르 9,38)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누군들 어떤 이유에서건 쳐낼 이유를 못 찾아내겠습니까?
   자기 자신이건, 혹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이든 그것은 끝내 믿을만하지는 않습니다. 인간 언행(言行)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기준을 든다면서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마르 9,41)를 규정한 것은 어쩌면 ‘문 없는 집, 담장 없는 마당’ 같은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딱 이만큼, 이 가을 넉넉하게 영글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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