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든 이를 꾸짖어 쫓아내자 군중들은‘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며 놀라게 된다. 예수님시대 각종 질병, 특히 뇌질환은 더러운 영이 사람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하느님 권능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더러운 영의 제압을 눈으로 확인한 그들은 깜짝 놀랐고 새로운 권위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권위(權威)의 사전적 의미는‘다른 사람을 통솔하여 이끄는 힘’인 반면 권위적(權威的)이라는 단어는‘지위나 권력을 내세우며 상대를 억압하는 행위’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위를 권위적인 것으로 오해하여 권위마저 부정하고 있지 않나 반성하게 된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권위적 행태를 질책하셨는데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다녔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는 윗자리를 좋아한다고 꾸짖으셨다.(루카 20, 46 참조) 율법학자라면 의당 율법과 전통규범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일이 직무의 본질이겠지만 그들은 외적인 화려함과 가르치는 직분을 통해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가진 그 권위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원하지만 자신을 낮추고 기득권을 포기하며 남을 섬기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 같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국민들이‘호 아저씨’라 부르며 존경했는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권력을 통해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죽을 때 책 이외에 몇 벌의 옷,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신발 등이 전부였다고 한다. 화려한 복장, 인사 받기, 높은 자리, 윗자리는 자신의 교만만 드러날 뿐 지도자의 권위가 아님을 알았기에 그는 권력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지 않았고 국민들은 그 모습을 존경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지위의 높음과 소유의 많음이 성공이요 권위의 척도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권위적인 것일 뿐 하느님의 가치 기준은 아니다. 예수님은 비록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을 나눌 수 있고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닌 남을 섬기는 것이 더 큰 덕임을 말씀하셨고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사셨던 섬김과 낮춤의 겸손이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권위의 참모습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