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산을 탕진하고 타락한 삶을 살던 아들이 돌아오자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들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표현합니다. 동시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 되어라.”(레위 11,44 참조) 하신 말씀으로 자녀들인 우리 역시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코린 5,19ㄱㄷ.20ㄱ)
복음 선포는 종종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실천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좋은 것일까? 혹시 현실에서 실천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며, 이미 복음과 나의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더 큰 문제입니다. 과연 누가 더 복음적인 사고를 하는 것인가? 나의 신앙은 현실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현실의 삶과 연결되기 위하여 그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즉 가족을 포함하여 열 명 이내의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외의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지나가는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실천의 대상이며, 몇 안 되는 기회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실천되어야 하는 대상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나의 가족이며, 나를 만나는 몇 안 되는 이웃들입니다. 그들은 나의 욕구충족의 대상이나 경쟁의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파견된 사람임을 인식할 때 가능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랑을 체험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을 고백하시고, 그 사랑의 선포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2코린 5,19 참조) 우리는 주변의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파견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엄혹한 현실 앞에 선 신앙인들은 “왜? 나만…!”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그분의 울컥하게 하는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나는 현실의 삶 속에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파견된 자임을 마음에 새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