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간절해서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고, 품어주시고,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 주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잠잠히도, 가만히도 계시지 못하며 우리가 잘 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힐 횃불이 타오를 때까지 일하십니다.(이사 62,1 참조)
부창부수(夫唱婦隨),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고, 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과 친교는 결코 홀로 머물지 않고 더불어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라는 것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그런 인간적인 관계는 새롭게 역전되어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드러난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그 지극한 사랑으로 하나 된 가운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에 그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 닮은 성모님은 부족한 당신의 사랑을 예수님께 봉헌하고 아들의 처분을 겸손되이 기다려 은혜로운 하늘나라의 풍요로움을 이루는데 작은 도구가 되셨습니다.
나자렛에서 14km 떨어진 카나까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신 성모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손님이라면 그에 걸맞게 신랑신부에게 덕담도 하고, 신랑신부 부모님에게 축하의 인사도 건네며, 한 몸을 이룬 신혼부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즐기면 될 것을 성모님은 거기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성모님은 마치 자기 자식 잔치인 양 가만히 즐기지 못하시고 남의 부엌을 넘나들며 음식은 부족한 것이 없는지, 급한 대로 당신이라도 소매 걷어붙이고 부침개라도 부쳐야 할지, 나물을 무쳐야 할지 분주합니다. 그러곤 잔치에 특별한 메뉴인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집주인이나, 잔치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는 책임을 맡은 일꾼인 과방장보다 먼저 알고서는 발을 동동 구르십니다.
이런 오지랖도 참 없습니다. 자기 일을 넘어서 간섭하는 주제넘은 행동을 가리키는 오지랖이라는 뜻이 참 부정적으로 읽히지만 여기서 성모님의 오지랖은 참으로 필요한 오지랖이었습니다. 그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지랖이 넓어서 잠잠치 못하는 성모님의 애끓는 사랑과 만나 하늘나라의 풍요로움을 이루게 됩니다.
괜한 오지랖으로 눈총받기 싫어하는 이 시대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을 향한 선한 오지랖을 피워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