렙톤 두 닢이 헌금함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더 많은 헌금이 부자들의 손에서 이뤄졌어도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은 부자와 비교하자면 푼돈일 수밖에 없는 렙톤 두 닢의 헌금을 눈여겨보시며 입을 여신 것이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양이 아니라 질을 보시며 말씀하신 것이고 렙톤 두 닢을 그저 동전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과 정성으로 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신다. 우리는 그저 눈에 들어오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만, 당신은 우리와는 다르게 ‘눈여겨’ 보신다. 그러기에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이의 헌금을 비교하시면서도 가난한 이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이다.
우리도 우리를 본다. 예수님은 보이는 대로가 아닌 ‘들여다’ 보시며 그 이면과 너머를 보시는데 우리는 그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진 것의 일부라도 부자의 헌금이 빈자들의 헌금보다 좋다고 여긴다. 헌금이 많을수록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가난한 그녀는 어떤 이유로, 무슨 마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봉헌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만일 우리처럼 보면서 액수로 자신의 헌금을 저울질했다면 그렇게 봉헌할 수 있었을까?
헌금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나오는 행동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은 다를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눈으로 보았기에 자신의 처지를 ‘달리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움직였기에 저울질하지 않고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녀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해 주시니까!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그녀는 교우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에 오늘만은 아니라고 겸손치 않으시면 좋겠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겸양치 않으시면 좋겠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삶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시는 우리 형제자매님들이 있기에 우리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