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이번 강론에서 저는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어떤 상징을 가진 것인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을 사제인 저에게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전 자주 아니 더 빈번하게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벌써 눈치채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말씀을 봉독하고 기억해야 하고 마음에 모셔 되새김질하여서 그 뜻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런 의미조차도 느끼지 못했을 때, 동시에 무슨 말을 신자들 앞에서 해야 하는지 도통 알지 못할 때, 저는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정말 할 말이 없고 도무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강론대에 서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 자리에 참석한 신자분들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의 행동을 잠시 동안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제가 사제가 되어서 체험한 것이 아니라 신자일 때부터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오해를 할 수 있기에 잠시 설명 드리자면 사제가 강론 준비를 아무리 잘해서 강론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죠. 특히 강론을 전달할 때에 원고를 읽어버리면-잘 알아듣지 못하게- 집중이 안 돼서 전혀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으면 전혀 주의를 끌지 못하므로 아무 소용없는 경우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날 말씀에 대해서 귀먹고 벙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도 강론대에서 저 자신이 복음에 자신이 없어서 강론을 읽어버리면서 저도, 신자들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성경을 해설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제 본인에게 말씀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제 안에서 숙성되고 난 후 비로소 신자들에게 말씀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제인 저에게 ‘에파타’라는 이 한 말씀은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저(사제)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에파타가 적용이 되고 그 기적이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기적으로 인해 비로소 귀먹고 벙어리인 제(사제)가 신자들 앞에서 저를 구원하였음을 증거하게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오늘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고 저를 구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