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은 그 원의가 이루어져야만 드러나는 의지의 표현일까요? 기대가 이루어지기 전이나 이루어지고 있는 중에도, 심지어 기대가 사라진 뒤에도 감사하는 마음은 한결같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하면 우리의 일상인 먹고 자고 일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의식하는 삶의 근원은 사람이 짓고 허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생명이 먹는 일을 당신의 몸과 피로 삼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바탕을 깨닫도록 제자들과 많은 사람에게 먹을 빵이 나온 자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나아가 짐작이 분명한 앎으로 옮아가도록 불과 몇 명만 먹을 양의 빵이 많아지기 전에 감사를 드리시고(요한 6,11 참조) 먹고 난 다음에도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라는 말씀에서 먹는 일이 일러주는 참된 뜻을 잊지 않게 하시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삶의 원천을 알려주는 깨어 있음이 아닐까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면 은총이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기도가 부족하다고 여기거나,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는 편협한 신심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할 일을 연이어 겪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진 앎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가 바라는 대로 다 이루고 살다 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욕심(고통)은 더욱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바라는 것이 선한 뜻을 지녔다 해도 우리네 가슴 속이 위태롭기 그지없는 것이 사실인데,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결핍 속에서 하느님 뜻대로 이루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알아보려는 그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감사는 인간이 생겨난 안식처를 알아 가는 생명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 여정이 우리의 어떤 처지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삼기에, 오늘 복음에서 배고픈 예수님을, 밥 먹는 예수님을, 배부른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