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과공지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1차 청소년 주일 담화

(2016년 5월 29일)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우리는 2016년 7월 제31차 세계청년대회가 열리게 될 크라쿠프로 가는 순례 여정의 막바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길고 어려운 여정에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말씀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례를 2014년에 첫 번째 참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에 대하여 함께 성찰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2015년의 주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였습니다. 2016년에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라는 말씀에서 힘을 얻도록 합시다.

 

1. 자비의 희년

 

이 주제로 2016년 크라쿠프 세계청년대회는 자비의 희년의 한 부분이 되고 세계적 차원의 청년의 희년이 될 것입니다. 국제적인 청년들의 모임이 희년에 개최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처음으로 온 세상의 젊은이들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불러 모으신 것은 바로 구원의 성년(1983-1984) 때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에 제15차 세계청년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165개 나라에서 2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로마에 모였습니다. 지난 두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크라쿠프에서 거행되는 청년의 희년은 이 성년의 가장 중요한 때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묻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거행하는 이 희년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25장의 성경 구절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50년마다 모든 이를 위한 화해(jobal)의 때로 성년을 거행하라고 그들을 부르는(jobil) 나팔 소리(jobel)를 들었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과 피조물과 좋은 관계를 새롭게 맺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빚을 탕감해주고, 가난에 빠진 이들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며,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장려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영원한 은총의 때를 선포하고 완성하고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셨습니다(루카 4,18-19 참조). 예수님 안에서, 특히 그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희년의 가장 깊은 의미가 완성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희년을 선포하면 우리는 모두 놀라운 은총의 때를 살도록 초대받습니다. 교회도 하느님의 현존과 가까이 계심의 표징을 많이 제시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일깨우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특별히 자비의 성년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교회에 맡기신 임무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때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표징과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자비 주일 첫 저녁 기도 강론, 2015.4.11.).

 

2.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칙서 「자비의 얼굴」, 13항 참조)라는 이 특별 희년의 표어는 2016년 세계청년대회의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하느님 자비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노력합시다.

 

구약 성경은 자비를 언급할 때에 여러 가지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헤세드’(hesed)와 ‘라하밈’(rahamim)입니다. 하느님과 관련하여 ‘헤세드’를 사용할 때에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늘 용서하시는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대한 당신의 변하지 않는 신의를 나타냅니다. 두 번째 단어인 ‘라하밈’은 ‘내장’을 의미하며, ‘애타는 자비’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는 모태를 연상시켜 하느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그러한 사랑은 우리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우리 이웃과 함께 느끼고 아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됩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자비 개념은 사랑의 구체적인 현존을 포함합니다. 이는 충실하고 거저 주며 용서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호세아서의 구절에 아버지의 자녀 사랑에 비길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매우 좋은 보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1-4). 자녀의 벌을 받아 마땅한 잘못된 태도에도 아버지는 사랑에 성실하여 뉘우치는 자녀를 언제나 용서합니다. 이렇듯 자비에는 언제나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신약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eleos)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완성하고자 하신 일의 종합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마태 9,13 참조). 우리 주님의 자비는 주님께서 인간의 비참함을 굽어보시며 이해와 치유와 용서가 필요한 이들에게 당신의 연민을 보여주실 때에 특히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 안의 모든 것이 자비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자비이십니다.

 

루카 복음 15장에는 자비와 관련한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기쁨, 곧 하느님께서 죄인을 찾으시고 용서해 주실 때에 느끼시는 기쁨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복음 전체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저마다는 되찾은 양이고 되찾은 은전입니다. 우리 저마다는 거짓 우상, 행복의 허상을 추구하다가 자유를 허비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되찾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내심이 넘치는 아버지이시기에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해 주시면서 늘 성실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면 그분께서는 마치 우리를 자녀처럼 당신 집으로 받아들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마음은 당신께로 돌아오는 모든 자녀에 대하여 기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어 잔치를 베푸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께 돌아가서 용서를 청하면 기뻐하십니다”(2013년 9월 15일 수요 일반 알현).

 

하느님의 자비는 참으로 구체적이며 우리 모두는 직접 그 자비를 체험하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제가 열일곱 살이던 때의 어느 날 저는 친구들과 놀러 나가려다가 먼저 성당에 가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깊이 신뢰할 만한 신부님을 만나게 된 저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제 마음을 열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습니다. 이 만남이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겸손하게 숨김없이 마음을 열면 아주 구체적으로 하느님 자비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성당에 가려고 첫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그 신부님 안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앞에 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찾으시며 우리를 먼저 발견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마음의 짐을 지고 ‘나는 이런 일도 저질렀고, 저런 일도 저질렀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성사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포옹을 느끼고, 고해소가 자비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언제나 용서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를 어루만지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죄와 단점과 잘못에도 여러분을 끊임없이 신뢰하고 희망으로 여러분 삶을 바라보는 영원한 사랑의 눈길이 여러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시기에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여러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까? 바오로 성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의 힘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세계청년대회의 십자가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주신 선물로 1984년부터 모든 세계청년대회와 함께하여 왔습니다. 이 소박한 십자가를 만난 젊은이들의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은 변화와 얼마나 많은 진실하고 올바른 회개가 이루어졌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렇게 자문하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 특별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자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척도가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만질 수 있고, 하느님 자비도 우리를 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 옆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수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교만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을 모독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죄수는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32.39-43 참조). 우리는 이 두 죄수 가운데 누구와 같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하게 구는 이와 같습니까? 아니면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그 자비를 청하는 이와 같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늘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할 것입니다.

 

3. 하느님 자비의 도구가 되는 놀라운 기쁨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참행복은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 거저주시는 사랑이라는 하느님 논리를 받아들일 때,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같이 무한히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복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요한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7-11).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푸시는지에 관하여 매우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나서 이제 저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이러한 자비의 도구가 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피에르 조르조 프라사티 복자의 모범을 생각해봅니다. 이 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아침 성체를 통하여 저를 찾아와 주십니다. 그러면 저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여 제가 할 수 있는 미미한 방법으로 보답합니다.” 피에르 조르조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세심하게 반응하는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인 것 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며 이야기를 해 주고 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매우 조심스럽게 가난한 이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참되게 실천하였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 병세가 위중하게 되어 죽음을 앞둔 날에 그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돕는 방법을 설명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가난한 이들이 장례식에 참석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젊은 피에르 조르조는 그들에게 친구가 되고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늘 참행복과 마태오 복음 25장을 연결시켜 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우리가 그러한 활동을 하였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자비의 육체적 활동을 다시 찾아보라고 권유합니다. 이는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보고 따뜻이 맞아주며, 아픈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만나러 가며 죽은 이를 묻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영적 활동도 간과하여서는 안 됩니다. 의심이 많은 이들에게 조언하고, 무지한 이들을 깨우치고, 죄인들을 꾸짖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성가신 이들을 인내하며 참아내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자비는 단지 ‘원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마음만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비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의 척도이자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뢰를 얻는 데에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2016년 1월에서 7월까지 매월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을 각각 한 가지씩 선택하여 실천해 보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 자비의 겸손한 사도인 파우스티나 성인의 기도에서 영감을 찾으십시오.

 

“주님 도와주소서.

 

저의 눈이 자비로워져서

결코 겉모습으로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언제나 제 이웃의 영혼 안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고

그들을 돕게 하여 주소서.

 

저의 귀가 자비로워져서

이웃의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들의 고통과 탄식에 무관심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저의 혀가 자비로워져서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하여 험담을 하지 않고

모든 이를 위로하고 용서하는 말을 하게 하여 주소서.

 

저의 손이 자비로워져서

많은 선행을 하게 하여 주소서.

 

저의 발이 자비로워져서

제가 피곤하고 지쳐도 저의 이웃을 서둘러 돕게 하여 주소서.

 

저의 마음이 자비로워져서

제가 이웃의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여 주소서.”

 

(일기집, 163 참조)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는 활동을 수반하는 것이기에 매우 구체적이고 어려운 생활 계획입니다. 가장 분명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실천하기 힘든 자비의 활동에는 우리를 모욕한 이들,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 우리가 적으로 여기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거듭 용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워 보입니까! 그럼에도 용서는 우리의 나약한 손에 쥐어진 도구이며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것입니다. 반드시 증오와 분노를 버리고, 폭력과 복수를 포기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자비의 얼굴」, 9항).

 

저는 세상이 이토록 분열된 것에 지쳤다고 말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분파 세력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고 그토록 많은 전쟁이 일어나며 심지어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에 자신의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자비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간구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자비는 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정의는 매우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기도를 합창하며 주님께서 우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4. 우리를 기다리는 크라쿠프!

 

우리가 폴란드에서 만날 날이 불과 몇 달 안 남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과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성인께서 태어나신 도시인 크라쿠프는 팔과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로 바로 우리 시대의 위대한 두 자비의 사도들의 고향인 도시에서 청년의 희년을 거행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우리의 시대가 자비의 때라는 것을 알아채셨습니다. 당신의 교황직을 시작하시면서 성인께서는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을 발표하셨습니다. 2000년 대희년 때에 성인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를 성인품에 올리시며 현재 부활 제2주일에 거행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제정하셨습니다. 2002년에 성인께서는 몸소 크라쿠프의 ‘하느님 자비의 성당’을 축성하시고 세상을 하느님 자비에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져 그들의 마음이 희망으로 채워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불꽃은 하느님 은총으로 타 올라야 합니다. 이 자비의 불은 세상에 전해져야 합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서 세상은 평화를 얻고 인류는 행복을 찾을 것입니다!”(크라쿠프 하느님 자비의 성당 봉헌식 강론, 2002.8.17.)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하느님 백성의 공경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진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봉헌된 크라쿠프의 성당에서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신뢰하시며 여러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많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눈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할 준비가 되신 그분의 자비로운 시선에 여러분을 여십시오. 그 눈길은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여러분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눈은 여러분의 젊은 마음 안의 깊은 갈증, 곧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참다운 행복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며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가며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십시오. “예수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분의 무한한 자비가 여러분을 감싸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도, 이기주의와 증오와 깊은 절망으로 상처 입은 이 세상에서 활동과 말과 기도로 자비의 사도가 되십시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의 말씀대로 여러분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와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랑의 불길을 전하십시오. 이러한 사명에서 저는 격려와 기도로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크라쿠프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의 영적 준비 여정의 이 마지막 단계에서 저는 여러분 모두를 자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맡겨드립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어린 강복을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1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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