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구장 강론

다해 연중 15주일 강론

( 2019.7.14. 10:30, 성바오로 성당)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찬미예수님!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먹고 사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한 주일 동안 직장에서 가정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좌우에 앉아계신 분들과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 열심히 사느라 수고하셨다고 격려하고 위로하십시다.’고생 많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여러분과 함께하시면서 여러분이 힘든 삶속에서도 나름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물음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인 대답을 주십니다. 그 대답이란 바로 우리 신앙의 핵심 키워드인 사랑입니다. 저는 때로 이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잠시 주춤거릴 수밖에 없고 때로 할 말을 잃고 먹먹해지기도 하는 데, 여러분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듣고 쉽게 말하면서도 깊이 알지 못하고 쉽게 간과해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그 사랑입니다.

 

1독서 신명기는 모세의 말을 통해서 답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마치 유언과도 같은 당부를 합니다. 모세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켜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에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 각자의 입과 마음에 담겨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말씀을 실천하면 된다.’는 것이 바로 모세의 대답입니다.

 

2독서 콜로세서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통해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콜로새 신앙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는 이교에서 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곳 신자들은 아직 이교도였을 때처럼 좋은 영과 나쁜 영 등 다양한 영들을 거론하면서 혼란스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오류를 잡기위한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대답 역시 간단명료합니다.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신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모든 사람과 모든 영들 위에 계신 분으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오직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심오한 신학을 바오로 사도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볼까요? 우선 율법교사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율법교사는 오늘날 성경학자로서 구약의 율법에 정통하고 엄격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모든 계명들을 충실히 지키지 않으면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묻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답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이라 말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식으로 물음을 던졌을 겁니다. 그러나 뜻밖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라는 보화가 담긴 답변을 건네십니다.

 

이 율법교사는 어려서부터 구약의 모든 계명들을 충실히 지키지 않으면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내용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잘 안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대부분 별개의 것임을 자신이나 타인을 통해 경험합니다. 그래서 항상 갈등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는 그런 경험이 갈등으로 작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감히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스럽지 않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당시 유다인에게 이웃이란 오직 같은 유다인일 뿐, 사마리아인은 유다인과 이교인의 혼혈 후손으로서 이교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에게 하는 가장 큰 욕 중 하나는 이런 사마리아인 같은 이!’ 라 부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은 필경 유다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강도에게 맞아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유다인 사제가 멀찌감치 빗겨서 지나가버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유다인인 레위인도 길 반대쪽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유다인이 상종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당한 사람을 유다인이니 이방인이니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비용까지 지불해가며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치시면서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아까의 당당함과는 사뭇 다르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대답을 했겠지요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처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그 율법교사는 뒷통수를 단단히 맞았다 싶었을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언행을 통해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인지를 명료하게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응답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구체적인 내용으로 전달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함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웃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두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며 더구나 떼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동시에 하셨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로 연결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뜨거워질수록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분명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 또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계명들과 규정을 지키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하나씩 조금씩 한걸음씩 실천해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절하면서도 단호하게 복음의 말미에서 하신 말씀대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1독서 말씀처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 복음 말씀의 핵심입니다.

 

끝으로 우리 시대에 가난한 이웃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자비를 베풀었던 성녀 마더 데레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실천적인 행위)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번 주 한 주일 살아가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이 내 삶에 의미를 주는 살아있는 말씀이 될 수 있도록 우리 각자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여러분과 함께 계시면서 여러분의 삶이 의미와 행복을 느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아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0 2019.08.04[명촌성당미사] 연중 18주일(다해)강론 울산대리구청. 2019.08.05 11
109 2019.07.28[무거성당미사] 연중 17주일(다해)강론 울산대리구청. 2019.08.05 16
108 2019.07.21[전하성당미사] 연중 16주일(다해)강론 울산대리구청. 2019.07.22 18
» 2019.07.14[성바오로성당미사] 연중 15주일(다해)강론 울산대리구청. 2019.07.16 9
106 2019.07.07 [옥동성당미사] 연중 14주일(다해)강론 울산대리구청. 2019.07.08 22
105 김영규 안셀모 대리구장 취임사 울산대리구청. 2019.06.24 31
104 19. 03. 25.일 월요일 [대리구미사]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울산대리구청. 2019.03.26 39
103 2019. 03. 04. [대리구미사]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또는 성 가시미로 울산대리구청. 2019.03.04 27
102 2019. 02. 25. [대리구미사]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울산대리구청. 2019.02.25 21
101 2019. 02. 18. [대리구미사]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울산대리구청. 2019.02.18 30
100 2019. 02. 11. 월요일[대리구미사]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또는 루르드의 복되신동정마리아(세계병자의날) 울산대리구청. 2019.02.12 27
99 019,.01. 21. 월. [대리구미사] 성녀 아녜스 동정순교자 기념일 울산대리구청. 2019.01.21 24
98 2019. 01. 14. [대리구미사]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울산대리구청. 2019.01.15 19
97 2019. 01. 07. 월요일[대리구미사] 주님공현대축일 후 월요일 울산대리구청. 2019.01.10 32
96 2018. 12. 31. 월요일 [대리구미사]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울산대리구청. 2019.01.02 17
95 2018. 12. 17. [대리구미사] 울산대리구청 2018.12.17 16
94 2018. 11. 05. [대리구미사]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울산대리구청 2018.11.06 40
93 2018. 10. 29. [대리구미사]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울산대리구청 2018.10.30 16
92 2018. 10. 15/ 월요일[대리구미사]예수의성녀데레사 동정학자기념일 울산대리구청 2018.10.15 36
91 2018. 10. 15/ 월요일[대리구미사]예수의성녀데레사 동정학자기념일 울산대리구청 2018.10.15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