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 2419호 2017.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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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염철호 신부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하나요? 불의는 당연히 발고(發告)하고 벌을 받는 것이 맞는데 용서를 해야 한다니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 아닌지요?
염철호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jubo@catb.kr
구약성경을 보면“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 21, 24)라는 동태 복수법이 나옵니다. 이를 보면 구약이 복수를 장려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과도한 복수를 금지하는 법으로 눈에 피해를 입었다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눈까지만 복수할 수 있음을 규정하는 법입니다. 실제, 창세기 4장 24절에서 라멕은 자신을 해치는 이가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최대한의 복수를 다짐합니다. 동태 복수법은 이를 반대하는 일종의 복수 제한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11, 13) 왜냐하면 그것이 용서의 하느님을 닮는 길이고,(마태 5, 48)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용서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마태 6, 15∼16; 18, 23∼35) 그렇다고 해서 불의까지 무조건 눈감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는 당연히 발고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도 잘못을 저지르는 이를 꾸짖고, 말을 듣지 않거든 공동체에서 쫓아내라고 권고합니다.(마태 18, 15∼18; 루카 17, 3; 1코린 5, 13 참조) 이런 일에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 또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죄인이“회개하고 돌아왔을 때”그를 용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루카 17, 4) 만약 자신의 힘으로 용서하기가 어렵다면 기도로 하느님께 청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용서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루카 1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