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은 그 이름 석 자 때문에 죽는 거지요. 자기는 되게 큰일을 하고 흔치 않을 성공을 좇으며 삽니다만, 실상 세상이 굴러가는 것은 그리 대단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지고한 진리. 묵묵히 스스로 존재를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 입 없는 그들이 참 고맙습니다.
어느 환자분이 퇴원하시면서 이런 글을 써 주고 가셨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가는 9월의 밤. 2~3일 있으면 퇴원하는데 잠은 오지 않고 몇 자 적어 봅니다. 복도를 지나다 보니 그 밤에 간호사들 여섯 분이 너무도 조용해서 가만히 들여다 보니 말없이 바쁘게 각자 맡은 일, 업무를 열심히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짠해지더군요. 너도나도 귀한 집 자제들일 텐데….
환자들은 건강이 안 좋으니 심신이 쇠약하고 각자 생활과 삶에 찌들어 있지만, 간호사들의 일과를 보며 그렇게 바쁜데도 항상 웃음을 주는 모습은 감동입니다.
수술하고 오는 환자를 소수의 간호사가 들것도 없이, 그 무거운 남정네를 살며시 들어서 눕히는 모습, 참 건강하고 맑은 아가씨들의 활기찬 얼굴들. 길에 나서면 그 나이 예쁘게 꾸미고 멋 내느라 분주한 모습보다 훨씬 멋있어 보입니다.
간호사라는 직업의식, 그리고 봉사와 인내의 정신이 없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길, 간호사 여러분. 무한한 꿈이 있겠지만, 이 직업을 버리지 말고 미래에도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웃음 떠나지 않기를, 잠이 오지 않는 메리놀의 밤에 몇 자 적어 봅니다.'
큰일 하는 것 아닙니다. 그저 맡은 소임을 묵묵히 할 뿐입니다. 특별히 더 잘할 필요 없고, 안 하던 거 할 필요 없습니다. 해야만 하는 것을 제시간에 성실히 하면 됩니다.
단지 하나, 누가 '보든 안 보든'입니다. 본다고 하고 안 본다고 하지 않고, 이것 때문에 행동이 달라진다면, '아직도 인간이 멀었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병원이란 작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이들이 그래도 자기 몸을 믿고 맡길 수 있게 만드는 기본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든 안 보든, 묵묵히 자기 존재를 지켜내는 많은 이들의 자존감이 가볍게 처리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함부로 대하고, 경망스레 말하며, 쉽게 분노하는 세상에 대한 점잖은 충고는 바로 우리 주변, 입 없는 자들의 매서운 침묵일 테니까요.
조영만 신부
울산과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에서 사목했고, 현재 부산 메리놀병원 행정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