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뉴스
매체명 부산일보 
게재 일자 2019.06.19 / 28면 


한센인과 함께한 40년 유의배 성심원 주임신부

“버림받은 한센인들, 안아 주고 입 맞추니 마음의 문 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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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 본당 제대에 선 유의배 신부.
유 신부는 “성심원에 와서 40년째 이곳에서 사목하고 있는 것은 한센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100 성심원은 한센인 보호 시설이다.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성심교를 건너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성심원. 지금은 한센인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많이 달라져 찾아오는 발길이 잦아졌지만 한때는 육지 속의 섬처럼 외따로 떨어진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이곳에 지구 반대편 스페인에서 찾아온 푸른 눈의 성자가 살고 있다. 한센인의 영원한 친구, 유의배 성심원 본당 주임신부이다. 세상과 격리되고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한센인들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온 지 올해로 40년째. 한센인들에게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발견했다는 진정한 성직자 유 신부를 만나러 성심원으로 갔다.

 
"현재 한센인 90여 명 성심원서 생활
평균 연령 80세 훨씬 넘는 고령자들
앞 못 보는 분 많아 말로는 한계 있어
스킨십 통해 다가가면 진심 받아들여
한센인 숟가락으로 음식 받아먹기도

한센인은 육체보다 마음의 고통 더 커
전염 안 되는데도 사회적 편견 여전해

프란치스코 수도회 선교사로 한국 첫발
진주 발령 났다 1980년 성심원에 부임

“코리아도 내전 겪어 마음 아프다”는
아버지 말씀 자주 들어 한국에 끌려
국가는 별 의미 없어 굳이 국적 안 바꿔

남은 인생도 순응하며 사는 게 내 사명"


 
더욱이 올해는 성심원이 개원한 지 6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 유 신부는 티없이 맑은 웃음과 진솔한 말씀으로 인터뷰에 진지하게 응했다. 곽경희 성심원 실장이 동석해 어눌한 신부의 발음을 정확히 잡아줬다.


- 6월 28일이 성심원 개원 60주년인데,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나?

“원래 1959년 6월 18일에 개원했다. 그런데 교회 전례력에 따라 28일이 개원 60주년 되는 날이다. 6월은 덥고 장마가 있는 달이라 오실 손님들의 불편을 고려해 개원 기념 행사를 미루기로 했다. 성프란시스코 대축일 주간인 10월 12일쯤 행사를 거행할 생각이다.”


- 현재 거주 중인 한센인 현황은 어떻게 되나?

“90여 명이 살고 있다. 한때 소록도 다음으로 많은 600여명에 달했으나 많이 돌아가셨다.”


성심원 한센인의 평균 연령이 80세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최연장자는 98세이며 최연소자는 50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다.


- 평소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기상벨이 울리면 한센인들을 문안한다. 오전 7시 미사를 집전하고 낮 12시 낮 기도를 한다. 오후엔 거의 매일 성심원 뒷산 웅석사 쪽으로 50분간 등산을 한다. 장애인들의 휠체어를 밀어주기도 하고 같이 산책도 하면서 보낸다. 오후 5시30분 저녁 기도를 하고 저녁에 또 한센인들을 문안한다. 위독한 분이 있으면 더 자주 문안한다. 음악을 듣는 시간도 많다. 한때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꿈이었다.(웃음)”


- 신부께서는 한센인들과 스킨십을 즐겨 한다고 들었는데.

“사랑의 표현이다. 처음 여기 와서 못 보고 못 알아듣는 한센인들을 포옹해 주면 좋아하더라. 여기 있는 분들은 시신경 손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말로만 인사하면 인식하지 못하니까, 만지면서 악수하고 안아 주고 입맞춤하면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어느 가정을 방문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손으로 음식을 먹여 주고 아이는 맛있게 받아먹는 것을 봤다. 그런 티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한센인을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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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강을 가로질러 한센인들을 실어나르던 철선.

 
- 한센인들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한센인들은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가정에 대한 복수 비슷한 감정,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나 미움, 과거의 아픈 기억까지…. 그런 것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적 사고방식에 익숙했으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고 미안했다. 세상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이들에게 상처난 피부에 입맞춤하며 천천히 다가가니, 결국 마음의 문을 열더라.”

유 신부는 각 가정을 방문할 때, 한센인들이 먹던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 신부의 입에 넣어줄 때 거부하지 않고 “아, 맛있어요”라며 받아 먹은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유 신부는 많이 먹는 것을 싫어하지만 한센인들의 선의를 외면할 수 없어 주는 족족 다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 한센인이 돌아가시면 염도 해 준 것으로 아는데.

“밤에 돌아가시면 장의사가 못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5년 정도 150여 분의 남자 한센인들 염을 직접 해 줬다. 신앙적인 관계로 사랑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시설에선 염을 못하도록 법규가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못 하고 있다. 그래도 임종은 하고 연도·장례 미사는 해 드린다.”

유 신부는 자신은 한센인을 위해 무엇을 해 준 게 아니라 그저 함께 살아 왔을 뿐이라고 거듭 말했다.


-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전한데.

“옛날에 비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약이 발달해 약을 먹으면 다 낫는다. 물론 한센인들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하지만 한센병은 유전하지도 전염되지도 않는다. 과학적인 지식을 갖추면 편견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제3회 이태석 봉사상(2014)을 수상했는데.

“고 이태석 신부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다. 참 성직자의 주춧돌을 놓은 분이다. 나는 그 수준에 도저히 못 올라가니까, (세상이) 그 주춧돌을 내려서 내 수준에 맞춰 놓은 것이다. 나와 이 신부님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차이가 크다.”

유 신부는 2016년 인류의 고난 경감과 예방에 공헌한 이에게 수여되는 적십자 인도장 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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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 역사관 내부 모습.

 
- 어떻게 성심원에 오게 됐나?

“1976년 1월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주변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을 지원했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원 안에 있는 명도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던 중 한 달간 성심원에 머물 기회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성심원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유는 장소 때문이 아니라 천사 같은 한센인들 얼굴에서 예수님을 봤기 때문이다.”

유 신부는 이후 진주 쪽으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진주서 자전거를 타고 성심원을 오가며 이탈리아 신부 일을 기꺼이 도와 줬으며 결국 1980년 성심원으로 부임하게 됐다. 유 신부의 본명은 루이스 마리아 유리베. 사람들이 ‘유리베’를 음역해 유의배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고 한다.


- 신부가 되기 전 보육원 생활도 한 것으로 아는데.

“스페인 내전(1936~1939) 중에 살던 집이 폭파돼 집을 잃고 10살 때 두 동생을 데리고 보육원에 들어갔다. 나는 신부가 되기 위해 중학교에 가는 바람에 1년 만에 나왔지만 동생들은 몇 년 더 보육원에 있어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의 버림 받은 느낌 때문에 한센인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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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가 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님들을 보면서 막연히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였던 삼촌의 영향도 컸다. 기차 타는 것을 좋아했는데, 프란치스코 신부들은 기차를 무료로 탈 수 있다고 해서 신부가 되고 싶었던 걸까.(웃음)”


- 한국은 언제 알게 됐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듣게 됐다. 아버지가 ‘코리아도 우리처럼 내전을 겪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때부터 왠지 한국에 끌렸다.”


유 신부는 처음부터 한국으로 오고 싶어 했지만 관구장이 한국에는 이미 몇 명의 신부가 파견돼 있고 너무 멀다며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그는 볼리비아로 파견돼 2년간 근무한 뒤 비로소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 최근 스페인에 간 게 언제이고, 향수병은 없나?

“3년 전 안식년을 맞아 간 게 마지막이다. 동생들이 바스크 지방의 풍경과 날씨 등을 사진 찍어 자주 보내준다. 향수병은 없다.”

유 신부의 국적은 여전히 스페인으로 남아 있다. 그는 자신에게 국가는 별 의미가 없어 구태여 국적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스페인에 가면 마치 외국 사람 느낌이 들어 불편하고, 다시 한국에 오면 또 외국 사람 같은 느낌이 여전히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적을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한국과 스페인이 축구 경기를 하면 마음이 가는 쪽이 자신의 고국일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비밀이라고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향후 계획에 대해 묻자 유 신부는 “인생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순응하는 거다. 내일이라도 수도회가 나를 딴곳으로 보내면 그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있다. 이 인생에 순응하는 거다. 그것이 내 사명이다”며 초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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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임종 못 한 게 ‘평생 응어리’로…

평생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온 유의배 신부지만 가슴에 맺힌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 임종을 못한 게 평생 응어리로 남아 있다고. 그는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관구장의 허가를 받아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세가 호전돼 한국으로 돌아온 뒤 1주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아들은 나보다 한국사람을 더 사랑한다’며 원망하셨다는 얘기를 뒤에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몇 년 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출국하는 날 비행기 탑승 직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을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심원 성당에서 미사 드릴 때마다 항상 부모님에 대한 사죄의 기도를 드린다. 행복했습니다. 또 만나겠죠.”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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