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뉴스
매체명 가톨릭신문 
게재 일자 2015-12-06 [제2972호, 18면] 

[복음생각] 깨어 있는 삶 / 염철호 신부

대림 제2주일(루카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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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주님의 길을 마련합니다. 오늘 전례는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삶을 살며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난 주 전례가 “깨어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면, 이번 주 전례는 일어나 예수님이 오시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치우며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는 길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이 인용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로 표현한다면, 깊이 파인 골짜기, 앞을 가리는 산과 언덕, 바로 가기 어렵게 만드는 굽은 길, 여러 굴곡이 있는 거친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1독서의 바룩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라고 말하고 있고, 2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회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으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골짜기와 산과 언덕, 굽은 길과 거친 길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불의함’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불의함이란 무엇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갈라 5,19-21에서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일,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이 참으로 불의한 것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정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의함을 없애고 주님의 길을 닦는다는 것이 매우 개인적이고 윤리적 차원의 문제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종종 말씀하시듯이, 불의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 전체,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의 길을 닦는 일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함께 풀어내어야 할 것들에는 주님이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제도, 잘못된 규정, 어그러진 가정환경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의가 이처럼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해서, 개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공동체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의 문제든, 공동체의 문제든 불의를 제거하고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그 구성원인 우리들 자신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얽혀 있는 불의를 마주한다 하더라도 우리 각자가 그 불의를 바로잡는 삶을 살지 않으면, 불의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종 우리는 ‘나 혼자 회개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라는 생각을 가지곤 합니다. 또 기껏 회개의 마음을 먹었다손 치더라도 당장 풀어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기에 쉽게 회개의 삶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주님의 길을 닦으러 나가도록 합시다.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고, 어려워 보인다하더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이를 위해 이번에는 너무 거창한 것부터 생각하지 말고, 조그만 불의부터 제거하는 삶을 시작합시다. 그러면서 주변 분들도 그 삶에 동참하도록 초대합시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는 삶’이란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가 당면해 있는 문제, 주님이 오시는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주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던 골짜기는 조금씩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낮아지며, 굽은 길은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부터 그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일은 영원히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