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소식 - 주보 PDF로 보기
가톨릭부산
(제2286호 2014. 8. 15.)
<1면>
전례력 : 성모 승천 대축일
표지 사진 :
전례
제1독서 요한 묵시록 11, 19ㄱ; 12, 1∼6ㄱㄷ. 10ㄱㄴㄷ
화답송 시편 45(44), 10. 11. 12. 16 (◎ 10ㄷㄹ)
◎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1. 당신 사랑을 받는 여인들 가운데, 제왕의 딸들이 있고,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
2.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 네 백성, 네 아버지 집안을 잊어버려라. ◎
3. 임금님이 너의 미모에 사로잡히시리라. 임금님은 너의 주인이시니, 그분 앞에 엎드려라. ◎
4. 기쁨과 즐거움에 이끌려, 임금님 궁전으로 들어가는구나. ◎
제2독서 코린토 1서 15, 20∼27ㄱ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성모 마리아 하늘로 오르시니, 천사들의 무리가 기뻐하네. ◎
복음 루카 1, 39∼56
영성체송 루카 1, 49. 48 참조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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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어머니와 아들
최병권 대건안드레아 신부 / 장유대청성당
저는 그림보다는 사진에서 더 감동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제가 본 사진 중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는 조선인 아들과 그 어머니의 마지막 작별의 순간을 담은 ‘어머니와 아들’ 제목의 사진이 있습니다. 일제의 군복을 입고 배낭을 맨 큰 키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손을 잡은 작은 키의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못내 보내지 못하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모습이었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애써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순간의 포착이, 어머니의 애틋한 모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아들, 삶과 죽음이 선명히 갈리는 전쟁터로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머니의 손을 놓고 전쟁터로 떠난 그 아들은 과연 살아서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 왔을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사진이 생각나는 이유는, 모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인 듯 합니다. 어머니는 징용간 아들을 떠나보내고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날까지... 만약 그 어머니가 교우였다면, 어머니의 손에는 묵주가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그 날 까지...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전구자, 일찍이 어머니이셨던 성모님은 그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어머니의 아들을 위해 당신의 아드님에게 부탁을 하셨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러셨을 것입니다. 설사 그 아들이 전사했다 해도 성모님은 그 어머니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줄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가장 큰 위로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 라는 곳에서 52세의 후안 디에고 라는 한 농부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나는 애통해 하는 모든 이의 어머니시다’ 라고 소개하셨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이렇듯 하느님 위로를 전해 주시는 위로를 주시는 분으로, 이는, 이 시대의 모든 눈물흘리는 이들, 모든 애통과 곤란 중에 있는 이들에게, 당신의 전구가 있다는 것,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용기를 내란 메시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또 그의 어머니, 우리를 위한 전구자 성모님을 세워 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한 평생 고생만 하셨지만, 결국 가장 큰 행복의 결말을 이루신 성모님, 아들이 먼저 죽는 모습을 보아야 했지만 결국 그 아들의 부활을 본 성모 어머니,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이 땅에 눈물흘리는 모든 어머니, 모든 이들에게, 그 모두를 넘는 새 날이 다가옴을 기억하라는 하느님의 가장 큰 위로와 희망의 약속,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지금 여기
무늬를 깁다.
이영 아녜스 / 수필가
바느질을 해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날 무늬를 위해
옷감 안쪽은 얼마나 많은 실들이 엉겨있는지.
수없이 엉킨 실을 딛고 매끈한 매무새가 만들어진다는 걸,
화려한 무늬일수록
수많은 매듭과 이음새들이 옷감 안쪽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단추 하나라도 달아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3면>
누룩
내 마음의 밭갈이
노옥분 글라라 / 시인, 수필가 gll1998@hanmail.net
출근을 하면 제일 먼저 닫쳐진 문들을 엽니다. 후텁지근하던 실내에 바람이 길을 내면 화초들은 저마다의 웨이브로 인사를 나눕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드러나는 어울림입니다.
작년 연말, 고층빌딩에 있던 사무실을 작은 정원이 딸린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동백꽃 지고 봄볕 비추니 새로 꾸민 정원의 잔디에도 초록이 번지고, 불청객 잡초도 함께 인사를 합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긴 겨울 견디며 틔운 생명이니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잔디보다 키가 큰 강아지풀과 민들레나 조뱅이처럼 강력한 뿌리로 땅 속 깊이 침투하는 그들을 계속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요즘은 업무 전, 일주일에 두세번 잔디를 살핍니다. 잔디를 깎진 못하지만 잡초를 뽑는 일은 자청(自請)한 나의 몫입니다. 냉이, 망초, 바랭이도 단골입니다. 뽑고 또 뽑아도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잡초에는 나의 모습도 어룽댑니다.
지난 해 8월 초순이었습니다. 제357차 자매 꾸르실료에 참가를 했었고, 3박 4일 동안 자신을 성찰하는 오롯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계와 전화기가 없는 세상의 시작은 물음표였지만 의문이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일로부터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그분과의 사랑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내면을 향한 시선으로 나를 만날 수 있는 참으로 달달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과식으로 배앓이를 동반하던 롤, 화수분 같았던 눈물 콧물의 은총, 봉사자들의 열정과 헌신에 감동하며 나도 그러리라는 고백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대만을 믿습니다” “저 글라라는 그리스도만을 믿습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내 마음의 밭을 바라봅니다. 잡초마냥 웃자라는 불순종과 게으름에 빠져 ‘나’라는 에고 주위를 여전히 맴도는 나를 만납니다. 오늘의 은총에 감사하며 졸시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고르고
뽑고
곁가지는 자르고
 
좋은 땅
알곡을 위해
오늘도 밭갈이 중 / ‘내 마음의 밭갈이’ 전문
길을 찾는 그대에게
거리에서 ‘불신 지옥 예수 천국’ 같은 문구를 가지고 확성기를 틀어 놓고 선교를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 마음이 거북합니다. 저는 올바른 신앙은 두려움보다는 사랑을 우선시해야 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읽어보면 예수님도 최후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먼저 조장하시는 듯하여 좀 의아합니다.
권순호 신부
엄연히 예수님의 종말 신앙에는 두려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저도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는 사랑이지 두려움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사랑은 두려움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항상 두려움과 함께 시작됩니다. 첫 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내가 좋아 하는 상대가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까, 언제나 걱정하고 조심합니다. 그리고 그 상대와 사랑이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남편들은 어떨 때는 공처가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공처가는 애처가의 한 단면일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기에 두려운 마음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없다면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보좌로 있었을 때 주임 신부님께서 다음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임신부는 보좌신부를, 보좌 신부는 주임 신부를, 그리고 신부들은 신자들을 두려워하고 눈치를 봐야 한다. 그것이 어떨 때는 사제를 올바르게 살아가게 한다." 아이들도 부모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부모들도 아이들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지, 올바른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지나쳐 전부가 된다면 굴종이 되고 사랑은 사라지겠지만, 두려움도 사랑의 완성으로 향하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완성될 때 더 이상 두려움도 없이 영원한 행복만이 가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