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를 위한 변론

가톨릭부산 2015.10.08 06:03 조회 수 : 143

호수 2341호 2015.08.16 
글쓴이 김상효 신부 

베짱이를 위한 변론

김상효 신부 / 신선성당 주임 airjazz@hanmail.net

불볕더위 속에서 베짱이가 빈둥거리고 있다. 하루 종일 노래만 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에 비해 베짱이는 한량이다. 겨우내 먹을 양식을 모으기 위해 검은색 외피를 두르고 불볕을 온몸으로 받는 개미들에 비하면 베짱이는 잉여 생물로 보인다. 그들이 없어져도 세상질서에 별로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여름이 지나고 무료한 겨울이 닥치면 베짱이의 역할이 시작된다. 개미들이 겨우내 캄캄한 굴속에서 긴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베짱이가 기타 하나 메고 들어와 개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여름 내내 내심 고민하며 모아 놓은 선율과 화음을 쏟아 낸다. 베짱이 주연, 개미들 조연의 신나는 파티가 이어진다.

문화를 가꾸는 사람들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악절 하나를 완성하려고 하루 종일 뚱땅거리고 있는 본당 건반 주자, 자기 키 만한 기타를 메고 와서는 건달 같은 몸짓으로 연습하는 본당 학생,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에게는 너무도 중요하다며 선을 만들어 내는 꽃꽂이 봉사자. 이들이 베짱이다. 자신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서 좋은 화폭 하나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들이 베짱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목표한 아름다움 하나 건져내기 위해 오늘도 무심히 낚시를 던져놓고 기다리는 사람들. 이들이 베짱이다. 때로 너무 취약해서 쉬이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때로 오랜 수련의 기간을 견디지 못해서 포기해버리기도 하고, 알아주지 않고 대우해 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쉬이 질식해 버리기도 하는, 그래서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보호해 주어야 할 베짱이들이다. 어느 날 우리가 삶에 지쳐있을 때, 어느 날 우리의 신앙 생활이 모래 씹는 듯 해졌을 때, 우리에게 다가와 특유의 낙천으로 우리를 부추겨 줄 귀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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