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 전례

모든 인간이면 누구나 동의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인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생각할 때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마치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죽을 존재라는 사실은 이성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곧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닫고 싶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주는 음울한 면들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앗아가버리고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먼 세계로 홀로 나아가야 하는 죽음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인간을 시간 내에 존재하는 현존재라고 표현하면서
이 현존재가 지닌 가능성 중에서 마지막 가능성은 바로 자신이 없어진다는 가능성,
즉 죽음의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심심풀이와 오락을 찾기도 합니다만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라자로의 모습은
바로 죽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죽은 지 며칠 지나서 냄새를 풍겼던 라자로의 모습은
우리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존재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 후엔 냄새나고 썩어야 할 송장이 되어 버리는
무상한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의 눈물과 마르타의 통곡을 주위에서 보고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열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지금은 시신이 되어 누워있지만
언젠가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요청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의 다정한 손길, 그의 따뜻한 마음과 그의 부드러운 눈길,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고상한 인격을  우리는 그리워하며
그를 다시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내고 허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면
그를 다시 보게 되기를 갈망하는 우리의 열망은
한낱 희망사항이거나 망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러한 갈망과 요청에 응답을 주십니다.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내고 허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이 있음을 주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셨을 뿐 아니라 당신 부활의 예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르타의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엄숙한 말씀은
오늘 복음 전체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지금 허구나 공상소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앞에 놓인 인류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할 때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으며
"사람아, 생각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인생의 끝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의 삶은 얼마나 큰 불안과 두려움으로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가치,
생명과 부활이신 주님과의
영원하고도 복된 만남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순절이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우리의 무상함을 일깨워주는 시기라면
또한 그러한 우리의 육체적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과 부활의 삶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시기라는 것도 기억하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