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 전례
  죄는 그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든,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하든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용서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데 달려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배후에서 우리를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미움과 분노는 증가하고 그에 대해 용서하려는 경향은 줄어듦을 발견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것은 큰 용기를 요구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셨고
  그래서 그분은 용서에 대한 비유를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종은 많은 빚을 졌었고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 갚는 것을 연기해 주는 것을 넘어서서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어 그를 보내주었습니다.    
  왕은 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약간의 빚을 진 -왕에게 진 빚의 50만분의 일-
  동료를 만나자마자 동료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처넣어 버렸습니다. 
  이 종은 작은, 옹졸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게 대한 사람들의 모욕이나 공격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범죄하는 것에 대한 단편일 뿐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도 하느님께 미안한 마음을, 그분의 사랑을 배신함으로써
  그분께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죄스런 마음을 가집니까?
  죄를 짓고도 미안해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디어진 영적 감수성으로 인해
  우리는 고해성사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주님께 아무런 미안함없이 영성체 행렬에 당당하게 참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록 작은 죄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얕잡아 보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고해의 필요성 조차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돌같이 굳은 마음이야말로 
  이 사순절에 우선적으로 회개해야 할 내용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