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사도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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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로서,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사건을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오순절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50일 뒤에 지내는 축제로서, 시나이 계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 사건에는 구원의 실현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탄생이라는 근본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의 현상을 거센 바람과 불꽃 모양의 혀로 묘사하고 있는데, 바람과 불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실 때 동반되었던 현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성령 강림 사건은 하나의 신현(神顯)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들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언어의 다양성이 동일성으로 바뀌는 것으로, 이와 반대되는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같은 언어를 쓰던 사람들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려고 하는데, 그 목적은 이름을 날려서 자신들이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11,4 참조).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십니다(창세 11,7-8 참조).
성령 강림을 통하여 언어의 동일성이 다시 이루어지고, 그것은 이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도들의 사명이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주십니다. 이는 창조 때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숨을 불어넣으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구원된 공동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된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성령 안에 새로운 삶
-한민택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베네딕토 교황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성경이나 교리 지식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격,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 안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방에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움직였던 것은, 바로 스승과의 만남이며 그분과 함께한 삶에서 비롯된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에 깊이 감화되었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인격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삶 안에 실현된 놀라운 구원의 신비를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을 성령 강림 사건으로 전해줍니다. 성령 강림 체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로운 현상을 보거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성령 체험은 내면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으로 정화되고 변화되는 체험입니다. 좌절과 절망, 두려움과 죽음으로 점철된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희망과 활력, 기쁨과 환희로 채워지는 체험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통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다락방을 박차고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예수님에 대해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령 강림 체험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던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아빠’ 하고 친밀하게 부르며 그분께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하는 체험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6-7)
그러나 유아기적 망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그 체험은 마술과 같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자 삶의 영역에서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특별히 시련과 환난을 겪으면서 서서히 우리 안에 실현되는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변화시켜 당신 아들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께서 우리 삶을 새롭게 하시어, 그분께서 주시는 열매가 풍성히 열리기를 청해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2-23. 25)

누구도 어느 것도 방해할 수 없는 힘, 성령
-김혜윤수녀-
인간을 가장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 것은 오해와 불통, 소통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세상의 모든 오해와 비난, 굴욕을 견디게 하는 힘은 진정어린 소통과 직관적 이해일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전례 본문들은 소통과 이해, 그로 인한 일치로 시작된 교회의 탄생을 선포합니다.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 부활시기의 절정에서, 성령의 오심을 통한 생명의 활기와 그 장엄한 역동성을 힘차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은 ‘부활 사건’에 대하여 모두 2개의 장(章)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공관복음에 비하여 현격히 많은 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내는데, 공관복음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적이고 분명한 사실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반면, 요한복음은 십자가상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 영광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 여정임을 강조하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당신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심에 집중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부활 사건과 제자들에게 준 ‘성령’을 연결시킴으로써,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 분’의 ‘숨’으로 새 창조됨을 표명합니다.
■ 성령과 새로운 숨
이 새로운 창조는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에 발생합니다. 곧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것은 부활하신 날 저녁의 일이고, 이는 성령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임을 암시합니다.
고대 근동인들에게 바람은 매우 신비로운 것이었습니다. 비(非)가시적 존재이기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오히려 바람이 인간을 통제), 소유하거나 잡을 수 없지만 감각을 통해 그 존재 여부를 감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신성(神性)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바람과 연관된 또 다른 소재가 ‘숨’인데, 인간에게서 나오는 바람이 ‘숨’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숨’ 역시 잡을 수 없고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아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사물 안에 침투하여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바람과 유사한 특성을 갖습니다. 창세 2,7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콧구멍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하느님의 숨이 인간 안에 들어가 ‘생명체’가 됨을 선언함으로써, ‘숨’(생명)이야말로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피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22절) 넣으시는데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선언이며, 이후 제시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 부여가(23절) 예수님께서 수행하셨던 당신의 일을 이제 제자들을 통해 지속하시고자 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생활이 마무리될 무렵, 당신의 현존과 동일한 연속성을 가진 존재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 성령과 혀 모양의 불꽃
제1독서를 통해 루카가 전하는 오순절(사도 2,1-11)의 이야기에서도 성령의 존재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2-3절)라는 ‘상징’을 통해 묘사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 전통에서 ‘바람’은 언제나 신적인 현존을 드러내는 소재였습니다. ‘불’ 역시 동일한 기능을 갖는데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절대적 힘이고 그 어떤 장애도 소멸시키는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은 오늘 본문에서 “혀”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리고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3-4절) 그리고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5절) 합니다. 창세 11,1-9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4절)을 건설하던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가 달라지자, 이해하지 못해 갈등을 빚고 결국 분열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는 반대로, 듣는 사람들 모두가 각기 자신의 언어로 알아듣고 상호 일치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성령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교회 공동체의 특징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상호 소통과 교감, 그로 인한 일치인 것입니다.
■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이처럼 성령은 서로 간의 차이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제2독서에 등장하는 코린토 교회는 서로의 다름 때문에 위기를 겪던 공동체였고, 이러한 혼란의 상황에서 바오로는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은 3개의 기능을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두 번째로 성령은 우리 각자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고유하고 다른 선물을 주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4-6절) 세 번째로 성령은 서로 다른 각자의 현실을 한 ‘몸’의 기능처럼 움직이게 합니다. 몸의 다른 부위들이 하나의 의도 안에서 통합적으로 움직이듯 성령에 의해 새로 창조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 각자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2,13) 즉 성령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로 만드시고 분열과 경쟁, 반목을 막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본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성령에 대한 매우 신학적인 통찰들을 제공합니다. ① 성령은 그리스도의 새로운 ‘숨’(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 ‘숨’으로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② 이러한 새 창조의 특징은 소통과 이해입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라 하더라도 같은 언어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③ 언어뿐 아니라 각자의 은사와 직분, 활동도 다르지만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치하여 그분의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이나 차이가 불편함이나 갈등이 되면,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폭력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시선과 마음으로 상대의 다름을 바라볼 때 그것은 분명 ‘함께 함’이 주는 풍요와 축복입니다. 상선벌악으로 숨 막히는 삶을 강요하고, 기복(祈福)과 규제로 인간을 조련하며, 금기와 검열의 무거움으로 권위와 제도를 유지하는 곳…, 교회가 결코 그런 곳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교회 공동체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 숨(생명)의 신비와 유기체적 일치, 서로의 삶을 빛나게 하는 연대를 성령의 힘으로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교회 본연의 임무이며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동수신부-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 리가 평화의 도구요 일치의 도구가 되어 구원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 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 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 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 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코린 12,4-7.12)
성령께서는 각각 다른 은사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들도 같은 성령 안에서 좋은 열매 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참조) 다섯 손가락의 우화를 보면, “엄지는 최고를 표현할 때 엄지가 사용되니 엄지가 제일 잘 났다 고 뽐내자, 둘째인 검지는 이에 질세라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내가 제일 많이 사용된다 하고, 셋째인 중지는 다른 손가락들을 쳐다보며 나란히 놓고 키를 재면 내가 제일 크고 힘이 세다고 으스댑니다. 넷째인 약지는 약혼이나 결혼에서 귀중한 사랑의 징표인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 바 로 나라고 자랑하자, 다섯째인 소지는 내가 가장 작고 보잘 것 없어 새끼손가락이라고 불리지 만, 누군가와 약속할 때 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하니 나처럼 소중한 손가락도 없다고 자랑 합니다!” 서로 잘났다고 뽐내지만, 다섯 손가락은 모두가 같은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섯 손가 락은 각자 나름대로의 사명과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손가락은 한 손바닥에 연결 되어 있는 것이며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에도 우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각각의 능력은 서로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 하나가 서로를 위해 있는 것이 고, 더 큰 하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부족한 ‘나’가 모여 하나가 되는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내가 바로 교 회’이며, 교회는 성령에 힘입어 각각의 능력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의 사명 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우리 하나 하나가 ‘교회’가 되어 머리이신 그리스 도를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어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 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진리이신 성령님, 길을 알려주시고 함께 가주십시오~
-박일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 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사명은 바로 성부께로부터 예수님께서 받으신 사명과 일치하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니기 에, 예수님의 부활로써 제자들은 확신을 갖고 활기차게 그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죄의 용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비 와 용서가 바로 교회가 완수해야 할 하느님의 정의를 이 루고 있는 기초입니다. 이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 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시고, 당신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입니 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요한 10,15)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지극정성으로 이 사명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불확실성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화(샬롬: VKĆOŇP)와 기쁨(당신을 만 난 체험으로 충만하게 마음을 가득 채운, 요한 20,20 참조)을 주시면서 파 견하십니다. 이 평화와 기쁨은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동반할 것이며 세상은 무엇이 참 평화인지, 무엇이 참 기
쁨인지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특별히 성 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는 데 첫째 조건은 바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막연하고 감정적인 감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과 계 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한 14,15 참조). 그런데 하느님으로부 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1요한 4,10 참조), ‘진리의 성령’께 힘입 어야만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을 지킬 수 있으며, 예수님의 적이며 내적 인 표지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성령께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새겨주 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도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시는 성령께서는 단지 기억을 일깨우시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 가르침의 모든 부분을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하시고, 새롭게 우리 안에 살 아있도록 해주십니다.
진리이신 성령님, 저희에게 길을 알려주시고 저희와 함 께 가주십시오!

성령을 받고,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어라
-장신호신부-
성령 강림 대축일인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라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배신하고 도망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추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령 을 주시면서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시지요.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은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고해성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용서받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5,6-10 참조) 영원히 지속되는 십 자가의 희생 제사의 효과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 모 든 죄를 용서받고, 세례성사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고해성사의 사죄경을 통하여 용서받으며, 미사의 고백기도를 통해서는 소죄도 용서받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제자들이 죄를 용서함으로써 교회의 직무를 수행한다면,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우리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32-35)를 들려주시면서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 느냐?”고 하셨습니다. 덧붙여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는 “일곱 번이 아 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새 계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는 사랑을 향한 출발점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새 계명도 함께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곧 사랑과 용서의 새 계명으로, ‘너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 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고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용서받은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다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 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생각합시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하고, 용서받아 야하기에 거듭 용서하며,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나도 체험하고 이웃도 체험할 수 있도록 용서하면 좋겠습니 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깁시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의 영향력-성령
서성민신부-
지금 우리 사회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개인방송이나 SNS를 통해 자신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개인이 표출하는 매체의 영향을 받으면, 그것이 조금씩 내 안에 쌓이면서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영향에 의해서 숨 쉬는 공동체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탄생한 교회는 성령이 뿜어져 나오는 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교회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기도, 성경공부, 봉사 등을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영향을 받기 위해 스스로 찾아 나섭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찾고 있지만,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느님의 엄청난 영향력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생각 속에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 자체가 이미 하느님에게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항상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대상이 되어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교회를 설립하여, 예수님의 뜻을 이어나갔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또 하나의 예수가 되어서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박해하던 로마를 정복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과거에 제자들이 하느님의 큰 영향을 끼치며 살았던 것처럼, 이 시대에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성찰해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성령이신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서공석신부-
성령강림 축일이 되면. 우리는 제1독서에서「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장면은 일어난 사실(事實)을 그대로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대한 초기신앙인들의 체험을 알리기 위해「구약성서」의 표현들을 빌려 각색(脚色)한 장면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 ‘불’ 등은「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각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각자가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想起)시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서,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하는 행위였습니다.「구약성서」는 하느님이 그들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서,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강립 장면에서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일은 이 흩으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혀 같은 불길로 주어지자,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 성령은 인간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시고, 그 차이는 인간간의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상호간에 차이가 있기에 서로 보고 들을 것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인간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존중하며 살리는 사회이고, 그것은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한 가지 말을 강요하는 통제(統制)된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강요와 통제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성령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풍요로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비와 용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靈)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창세기」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 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화답송에서 함께 읊은「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104,30). 예수님이 체포되자 모두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들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하면서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다시 소생한 것이고 그들의 모습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김인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개인고백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행 고해성사가 교회 안에 의무사항으로 채택된 것은 1215년(제4차 라테란 공의회), 13세기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懺悔)절차(節次)가 있었습니다. 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되면 엄청남 보속, 곧 고행(苦行)을 하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히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 한 번은 긍정적(肯定的)으로 말하고 또 한 번은 그것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반복하는 화법입니다. “믿고 세례 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마르코복음서」(16,16)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위협이 아닙니다.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말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상투적(常套的)으로 쓰던 말입니다. 그것에 반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믿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성서 안에 있는 부정적 표현들은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하자는 공동체의 마음다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죄의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 복음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1,29)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죄의식(罪意識)을 심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당신의 일을 지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일을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 숨결로써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주며, 그들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척도(尺度)로 사람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요한복음서」(8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당신네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단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시야 (視野)가 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사람들에 대해 판단하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양함을 풍요로움으로 보시는 넓은 시야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靈)이 살아 계시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 곧 성령이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야(視野)를 우리 앞에 열자는 것입니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보게 하시는 하느님의 숨결로 살자는 것입니다. ◆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5월 1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