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십자가를 만나고

가톨릭부산 2015.11.06 05:29 조회 수 : 118

호수 2344호 2015.09.06 
글쓴이 김기영 신부 

텅 빈 십자가를 만나고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 일본 히로시마 선교 gentium92@yahoo.co.kr

매달 첫 금요일에 봉성체를 가는 병원이 있다. 이곳에 평생 독신으로 사신 70대 중반의 형제님 한 분이 있다. 전임 신부님이 업무 인계를 하며 특별히 부탁하기도 했던지라 마음이 많이 쓰이는 분이기도 하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외우고 있고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구절을 물어보곤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성체를 가보니 탁상용 십자고상에 예수고상이 없고 텅 빈 십자가만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물었더니, 성경에“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4, 16)고 해서 고상을 떼어버렸다고 했다. 너털웃음이 나왔다. 우선은 그 구절을 어떻게 찾아냈는지가 궁금했고, 왜 십자가에 달린 예수고상이 그 말씀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는지가 궁금했다. 

분명 성경은 하느님 말씀이니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성령의 이끄심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그럴 때는 우선 신부들에게 물어보시길 바란다며 이야길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당이나 집에서 모시는 성상이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인들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은 다들 잘 안다. 다만, 성상이나 성화는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께, 혹은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기 쉽게 마음을 모아주는 영적인 도움을 준다. 만약, 이 형제님 생각대로 성상 자체가‘예수님이다, 성모님이다.’라는 생각으로 모신다면 그야말로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을 마음대로 상상해서 만들어놓고‘이것이 하느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우상숭배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힘이 세시니까 힘센 소의 형상을, 바람처럼 빠르시니까 달리는 말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하지만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에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구원의 표징으로 피 흘리신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면, 또 훗날 사람들에게 주님이 어떻게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전하기 위해 십자고상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될 수 없다. 

병실토론은 이렇게 일단락되었고, 형제님도 이해를 하신 듯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상숭배”평소 신앙생활 중에 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 형제님을 통해서 나도 모르게 하느님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은총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저런 설명 다 생략하고,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사는 것”이라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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