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269호 2014.04.20 
글쓴이 김기영 신부 

사랑 앞에 더 이상의 악이 없음을

김기영 안드레아 신부 / 일본 히로시마 선교 gentium92@yahoo.co.kr

얼마 전 주일미사 후, 귀여운 아기를 안은 필리핀 자매가 다가오더니 유아 영세를 부탁했다. 세례 당일, 이들 가족은 성당 오는 길을 헤맸는지 뒤늦게 도착을 했는데, 숨도 좀 돌릴 겸 유아 세례 신청서 먼저 작성하자고 했다. 일본어를 모르는 부인을 대신해서 남편이 기입을 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신청서에는 결혼한 장소 란에 “○○교회”라고 부모가 어느 성당에서 결혼했는지 기입하게 되어있었는데, 여기서 남편의 손이 멈칫거렸다. 순간 이들이 성당에서 혼인식을 못했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때, 비신자인 남편이 대뜸 흥분하며 이런 말을 했다.“내가 결혼하러 필리핀까지 갔을 때, 그곳 신부인지, 목사인지 초혼이 아니면 교회에서 결혼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과 재혼이고, 교회에서 결혼 안 했으니 이거 못 적는다. 그리고, 애새끼가 세례받는데 부모가 어디서 결혼을 했든 그게 뭐 중요하냐! 이 양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오늘은 아기 영세이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면 꼭 기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원칙적으로 성당에서 혼인식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재혼인 경우에도 교구에서 혼인 무효 판결을 받으면 성당에서 혼인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회의 관례가 그런 줄을 몰랐던 그는 당시 꽤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사목자도, 듣는 이도 아무 설명도 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덜컥 안된다고만 했을 때 얼마나 실망이 컸겠는가. 

그런데, 이 남자의 분노가 이제는 나를 먹잇감으로 삼고 있었다. 꼬박 1시간 동안 상식을 밑도는 온갖 폭언을 쏟아내었다. 말투를 듣자하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야쿠자들의 말투와 비슷했다. 혹, 이 사람도?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싶어서, 어쨌든 우리 성당에 와서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죄송하다며 무릎 꿇고 진심 사과를 했다. 하지만, 결국 이 남자는 영세받게 해달라고 울며불며 애걸하는 부인을 데리고 휭 하니 돌아가 버렸다. 가슴이 멍 했다. 

신학생 시절, 술 취한 채 부인을 찾으러 성전에 난입한 한 남자가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본당 신부님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갔던 적이 있었다. 주위 형제님들이 이 남자를 말리려고 했지만, 신부님은 그냥 놔두라면서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나가셨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때 왜 그 신부님께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분의 마음은 더 이상의 악을 멈추고자 했던 조건없는 사랑이었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 마음이었으리라. 나 역시 그때 보았던 신부님 덕분에 내 인격을 짓밟는 그의 폭언 앞에 무릎을 꿇을지언정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잔잔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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