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사는 길
이 동 화 타라쿠스 신부 / 노동사목 담당
빅터 플랭클은 유태인이자 심리학자였으며 정신과 의사였다. 그는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3년 동안 나치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몸과 영혼이 어떻게 파괴되고 죽어 가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나치 수용소가 가족과 재산, 자유와 존엄 등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렸다. 하지만 인간이 참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외부적으로 빼앗기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자기 깊숙한 곳에서 희망의 불꽃을 날려버리고 삶의 의미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것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간직하는 것들 바로 희망, 죽음보다 강한 사랑, 그리고 삶의 의미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 죽음보다 강한 사랑,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자기 자신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가장 깊은 차원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갈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창조의 시간에 하느님이 빚어준 자신의 살결을 회복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불어넣어 주신 숨결로 살아갈 때 가능한 일이다. 진짜 ‘나’를 발견하고 진짜 ‘나’답게 사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남의 판단에 맡기며 살아간다. 하느님이 나에게 불어넣어 주시고 빚어주신 좋은 모습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내가 소비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판단해주기를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소비자본주의의 꽃이라 하는 광고의 미학은 서슴없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물질문명이 이렇게 우리의 눈과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빅터 플랭클이 말하듯, 사람을 살리는 것은 희망과 사랑,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참된 나를 찾고 나답게 사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의 시간과 창조의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물질문명이 꾸며주는 내가 아니라 진짜 나답게 살 수 있을 때, ‘너’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귀하게 여기고, ‘너’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큰 사랑을 키우는 것이고, 그 사랑이 내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해주기도 한다. 그러니 참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고, ‘너’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는 일이다.
참다운 생명은, 행복한 삶은 그렇게 ‘나답게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