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온다

가톨릭부산 2015.11.04 17:14 조회 수 : 62

호수 2151호 2012.03.11 
글쓴이 탁은수 베드로 

부활이 온다

탁은수 베드로 / 부산MBC 뉴스총괄팀장

에피파니(epiphany). “나타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다. 교회에서는 흔히 ‘주님 공현 대축일’을 의미한다. 동방박사가 구세주를 경배하고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음을 처음으로 알림을 기억하는 축일이다. 문학이나 철학에선 ‘본질에 대한 직관’이나 ‘진리가 나타나는 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베일이 벗겨지듯이 갑자기 신비가 드러나고 사물의 진실이 분명해지는 순간”을 에피파니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별안간 얻게 되는 깨달음을 “돈오(頓悟)”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어느 시인은 봄을 “희고 노랗고 붉은 횃불을 든 꽃들의 혁명”이라며 “꽃들의 환한 시간 속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당신”을 무서웠다고 표현했다. 봄꽃을 통해 절대자가 내리신 우주의 질서를 문득, 그리고 무겁게 깨달았다는 뜻이리라. 꽃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피었다가 저문다. 우리네 인생도, 하늘의 별도, 땅 위의 산도 태어나 늙고 사라져간다.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인생사지만 봄꽃이 알려주는 우주의 단순하고 명확한 질서를 벗어날 순 없다. 겨울을 딛고 생명의 고개를 다시 내민 봄꽃들은 ‘생성과 소멸’,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억겁의 ‘에피파니’다. 
겨울의 심술이 길다 해도 찬바람이 훨씬 순해진 걸 보니 이제 곧 봄이다. 겨울이 혹독해도 봄은 온다. 빼앗긴 들에도 기어이 봄은 온다. 하지만 봄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여린 새싹들이 칠흑 같은 겨울밤을 견디며 언 땅을 뚫어야 봄꽃이 핀다. 시냇물이 작은 온기를 제 속에 모아 겨우내 견뎌냈던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흘러야 봄이 온다. 남쪽 섬에는 이미 매화가 피었다고 하니 혹한의 시간을 물리치고 생명의 기운을 가득 담은 봄이 올해도 어김없이 온다. 
한 달 후면 부활이다. 뼛속 깊은 추위가 봄꽃의 향기를 막을 수 없듯 죽음의 그늘이 영광스런 부활의 신비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부활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모멸을 견디신 인내를, 손과 발이 못 박히고 창에 찔려 피 흘린 예수의 고통을 마음에 담지 않으면 진정한 부활은 없다. 목숨을 빼앗기는 배신을 당하고도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지극한 용서의 마음을 따라가지 않으면 부활은 그저 매년 찾아오는 축일에 그칠 뿐이다. 봄꽃을 피우기 위해서 새싹들은 온몸을 떨며 채 가시지 않은 추위를 견딘다. 부활의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선 주위를 둘러싼 날카로운 유혹과 깊이 자리 잡은 무거운 욕심을 단호히 걷어내야 한다. 또 간절한 회개와 절제로 주님이 내어주신 사랑과 용서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부활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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