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함께 가는 친구
김양희 레지나
가을이 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또 겨울의 문턱이다. 무성한 잎을 다 떨구고 차가운 칼바람 앞에서 맨몸으로 우뚝 선 나무들의 당당함을 보며 사람의 영혼도 하느님 앞에서 저처럼 남루함을 벗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보는 계절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저마다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고 했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 다르다는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내 짐이 다른 이보다 무겁다고 해서, 혹은 가볍다고 해서 짐을 진 지게를 바꿀 수가 없으므로 우리는 주어진 시간들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아홉을 가진 자는 열을 채우기 위해 내어놓기가 더 어렵다지만, 처음부터 없었던 이는 아예 내 것이 없었던 고로 욕심을 부릴 줄 모른다. 기부금을 희사하고 자선을 베푸는 이들 가운데 고생과 땀의 가치를 아는 이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재물은 귀신도 부린다고 했다. 그러나 부(富)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른 것이 아닌가.
어떤 이가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갔다. 누더기를 입고도 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달동네 빈한한 사람을 돌보던 이는 금빛 찬란한 계단을 오르는데, 종을 부리고 살던 자신은 천 길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주일 헌금에도 인색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으나 이미 아무 소용이 없었다. 천국의 실체를 다룬 책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마지막까지 함께 가는 친구는 ‘선행’밖에 없다고 했다. 사랑했던 친구도, 피를 나눈 부모 자식과 형제도, 장례식장까지는 따라와도 더는 함께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선행과 자선의 행위만이 마지막까지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가, 그분 앞에서 나를 증언해 줄 것이다.
대림의 촛불 앞에서 나와 동행해 줄 마지막의 친구를 떠올려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득 없는 빈약함이, 비어 있는 두 손을 부끄럽게만 한다. 그분이 나를, 내가 그분을 마주 바라볼 때를 위해 나는 무엇으로 이 빈손을 채울 것인가.
어느 현자는 말했다. ‘생이란 단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덕을 닦을 수 있는 시간이라곤 이 짧은 기간이 전부인 것이다. 자선 주일이 아니더라도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없는지 항시 살펴볼 일이다.
요한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이신 하느님을 증언하러 왔던 ‘광야의 소리’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자선을 하되 드러나지 않게,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앞세울 수 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이 더욱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