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535호 2019.03.24 
글쓴이 권순도 신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권순도 신부 / 가톨릭성서사도직
 

   성서교육원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벽을 뚫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뚜두두둑 뚜두두둑” 그제서야 오늘 누수 공사가 있는 날이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공교롭게 미사 시간과 겹친 것입니다.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이지 않는 굉음에 미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소리가 전달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외부의 상황에 화를 내고, 여건이 맞지 않다고 단념하고 포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질 수 있나? 더 미사에 집중하고 더 정성스럽게 노력한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그렇습니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은 한낱 아주 작은 핑곗거리이고 아주 작은 분심 거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들도 있지요. 되돌아보면, 성소의 위기는 나의 내면의 문제라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시작된 위기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뭐해!”, “다들 그렇게 하는데!” 배신과 좌절, 포기의 생각은 그렇게 외부로부터 시작되어, 우리 마음을 송두리째 삼켜버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창세기 18장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려는 하느님께 아브라함은 여섯 번이나 거듭 청합니다.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이렇게 묻기 시작한 것이 마흔다섯, 마흔, 서른, 스물 그리고 열 명까지 무례할 정도로 거듭 그 도시들의 구원을 위해 빕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회개 아니면 멸망이라는 조건적 결말을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새로운 비전을 제공해 줍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희망의 메시지이며,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 아니면 멸망이라는 이중 구조를 넘어서, 삼 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해서 누가 봐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은 앙상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열정이 담겨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가지셨던 그 열정과 희망에 동참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호수 제목 글쓴이
2297호 2014/10/26  사랑, 그 이중성에 대하여 천경훈 신부 
2509호 2018.10.07  묵주 한 알 file 천경훈 신부 
1996호 2009.06.0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차성현 신부 
2113호 2011.07.10  내 안의 돌밭 차성현 신부 
2267호 2014.04.06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차성현 신부 
2468호 2017.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file 차성현 신부 
2814호 2024. 5. 26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file 차성현 신부 
2007호 2009.08.16  나는 밥이 되고 싶습니다. 차공명 신부 
2131호 2011.10.30  신독(愼獨)의 수양(修養) 차공명 신부 
2485호 2018.04.22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file 차공명 신부 
2647호 2021.04.18  살과 뼈 file 차공명 신부 
2266호 2014.03.30  태생 소경과 빛 주영돈 신부 
2627호 2020.12.13  대림은 자선과 회개의 삶 file 주영돈 신부 
2810호 2024. 4. 28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신다. file 주영돈 신부 
2085호 2011.01.02  제44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문(요약) 주보편집실 
2094호 2011.02.27  종말론적 낙천 종말론적 낙천 
2087호 2011.01.16  일상의 시간과 거룩한 시간 조욱종 신부 
2247호 2013.12.08  천사를 환대하지 않고 죄악을 퍼뜨리려 한다면! 조욱종 신부 
2178호 2012.09.09  에파타 조옥진 신부 
2329호 2015.05.24  성령 강림이 주는 의미 조옥진 신부 
색칠하며묵상하기
공동의집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