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피정 떠나실래요?
김 양 희 레지나
창밖에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영감을 주는 시간, 하늘이 내려오는 날, 피정의 시작이 서기에 가득 찼다. 사방이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수도원에서 사흘간의 침묵피정이 시작됐다. 소속 단체의 연례피정, 시끄러운 세상의 바다를 잠시 비껴나 제가끔 섬이 되는 시간이다.
현관 로비에는 작은 메모지와 볼펜이 비치돼 있을 뿐 서로 간에 미소는커녕 눈빛 언어도 허용되지 않는다. 말로써 주고받은 상처의 매듭들이 침묵 속에서 풀려지고 사라져간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는 실존의 알맹이가 드러났다. 식탁의 동료가 관계성 안의 아무개가 아니라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로만 비치기 시작했다.
수련 과정에서 성경 말씀 묵상 중 설핏 잠이 들었다. 꿈과 환상이 모호하다. 내 안에서 벌레가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이게 웬 벌레인가. 휴대폰은 죽담의 발아래 떨어져 있었다. 환시 중에 보였던 굵은 애벌레는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자의식의 변화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온갖 잡념, 분심, 시기, 질투였고 내동댕이쳐진 휴대폰은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는 의미로 다가왔다. 실제로 휴대폰은 이미 반납한 상태였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열자 자연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사각사각 하늘에서 흰 솜이 내리는 소리, 나뭇잎을 간질이고 지나가는 미세한 바람소리, 모든 것이 창조질서 안에 있었고 떠남의 미학에서만 들려오는 그분의 숨결이었다.
함께 있을 때보다 떠났을 때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듯이 낡은 나보다는 새로운 나를 위해서는 가끔씩 일상을 멀리 떠나올 일이다. 내 삶을 지배했던 모든 것들로부터의 떠남, 결국엔 버리고 갈 시간마저도 잠시 멈추어 두었을 때 기도 안에서의 또 다른 만남이 있었다. 새로운 변화의 시발점은 떠남에 있다.
며칠간의 침묵 체험에서 사소한 삶의 습관에 우리는 얼마나 깊이 중독돼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침묵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요 사랑이었다. 제가끔 휴대폰에, 인터넷에, 정보의 무한 바다에 내몰린 채 하루하루를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인간관계에 연연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깨달은 것도 소득의 하나였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시편 46, 10) 이 말씀이 무딘 자아를 일깨울 때마다 때 묻은 일상의 허물이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제 봄철 한가운데서 만물이 새롭게 돋아나고 있다. 내 안의 새로운 출발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면서 애착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한 번쯤 침묵 피정을 떠나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