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1주간 월요일 <“까닭이 있어“>
(레위 19,1-2.11-18; 마태 25,31-46)
우선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의 배려와 사랑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오늘 강론을 제가 맡게 된 일이 부담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려고 말씀을 대했지만 무거운 마음이 씻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를 읽다가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까닭이 있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의 파라오를
대번에 물리쳐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신 부분이었습니다.
“진작 나는 손을 내뻗어 너와 너의 백성을 흑사병으로 쳐서,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까닭이 있어 너를 살려 두었다.
너에게 내 능력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9,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그 모습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고통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용납하시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악으로 치닫는 것은 어쩌면
‘땅에 번성하고 땅을 가득 채우고 땅을 지배하되’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탓인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풀이 죽은 마음에 오늘 입당송이 큰 위로가 되었는데요.
일일이, 우리의 모든 것에 집중하여 도우시는 주님의 음성이라 느껴졌던 것입니다.
오직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좋으신 주님의 자비만을 바라는 삶이야말로
벌써 십 이년을 이런 모습으로 계신 삼촌신부님께
그리고 저희의 삶을 위해서 준비하신 주님의 ‘까닭’있는 뜻임을 깨치게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살아가는 것은
주님 말씀의 엑기스입니다.
땅에 주어진 하늘의 공식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감히 오늘 삼촌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까닭’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결코 알아낼 수 없는 하느님의 ‘까닭’에 항복하려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땅의 인간이 하느님의 ‘까닭’에 협력하는 모습임을 마음에 새기려 합니다.
오히려 이 긴 시간, 하늘만 바라보고 계신 삼촌신부님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느끼게 해주신 주님의 ‘까닭’에 찬미를 올리려합니다.
저에게 포꼴라레 영성으로 이끄시고 끼아라의 사랑 방식을 익히게 하시어
새로이 살아가도록 하신 주님의 ‘까닭’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 사랑에 더 강하게 전염되어,
그분의 사랑을 고스란히 살아내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