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락장송의 변고

가톨릭부산 2015.11.02 15:47 조회 수 : 30

호수 2044호 2010.04.11 
글쓴이 강문석 제노 

낙락장송의 변고

강 문 석 제노 / 수필가 63121057@kepco.co.kr

세상은 이미 완연한 봄기운으로 가득했고 섬진강변의 매화축제에 몰린 상춘인파 소식도 두세 차례나 방송을 탔다. 그런데 이렇게 포근한 봄날에 때 아닌 폭설이 쏟아졌던 것. 환경오염이 불러온 대재앙의 서막일는지 모르지만 실로 오랜만에 남녘의 잿빛 도시는 순백의 옷을 갈아입고 은빛으로 눈부셨다. 세상 만물이 고요 속에 잠든 한밤중에 소리 없이 내린 봄눈에 생을 마감한 적송은 기도원을 휘돌아 오르는 등산로에 갈라진 배를 드러낸 채 처참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한 마디로 비명횡사였다. 평소 강인함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던 낙락장송으로 수령 반백년은 족히 넘겼을 거목이 춘삼월에 사뿐사뿐 내려앉은 백설에 이렇게 맥없이 주저앉았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했겠는가.
자연 보호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내가 이 사고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쓰러진 나무의 생김새를 보고 나서였다. 마치 대형 비치파라솔의 살처럼 사방으로 뻗은 네댓 개의 굵은 가지들을 중층구조로 반듯하게 달고 있는 폼이 가히 정이품송을 떠올릴 만큼 품격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그 밑을 지날 수많은 군상들을 내다보며 그런 체형을 만들면서 키를 높여왔을 것만 같았다. 꺾인 나무를 무연히 내려다보자니 앞서간 성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나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나환자로 죽음을 맞이한 데미안 신부는 지금도 하와이 주민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었다. 20세기 냉전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평화의 사도로서 영일이 없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인생 역정이나 빈자의 어머니로 사랑을 실천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삶은 얼마나 눈물겨웠던가.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며 암울했던 시대 민족의 등불로 살다간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도 스친다. 
그동안 이 산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도 이렇게 잘생긴 나무가 서 있는 줄을 왜 까맣게 몰랐던 것일까. 속된 인간세계로 따진다면 큰 인물일수록 그가 떠난 뒤에야 더 크게 빛을 발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매사에 예각을 세우며 한 치의 양보도 못했던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넘어진 나무에게 부끄럽다. 나무는 지금부터라도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베푸는 삶을 살다 가라고 넌지시 주문한다. 그래야 한다. 내 인생 이미 황혼에 닿았으니 서둘러 실천해야 하리. 
유달리 한파가 심했던 지난 겨울은 이제 꼬리를 감췄다. 그렇더라도 나무들은 계절이 바뀌었다고 방심하다가 비명에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나에게 충격으로 남아있는 춘설의 기억을 털어내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성황당 고개로 산제비라도 찾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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