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다. 찬바람이 불면 괜히 옷깃을 세우고 낙엽 쌓인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쓸쓸히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슬픈 사랑 노래가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왜 사나?” 하는 출구 없는 질문을 던지며 고독감에 빠지기도 한다. 과학적으로는 호르몬의 분비나 일조량의 변화로 남자가 가을 타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복잡한 심경을 딱 잘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한여름 같은 열정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는데 겨울처럼 냉혹한 현실을 준비해야하는 남자들은 가을에 생각이 많아진다.
인생의 가을쯤을 지나고 있는 중년의 남자들은 특히 더 그렇다. 앞만 보고 내달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되돌아 볼 수 있는 인생의 고개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공존하는 시기가 중년이다. 특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중년의 불안이 커져가고 있다. 직장에서는 퇴출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말들이 어른거리고 문화가 서로 다른 상사와 후배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산다. 집에서는 공부하기 바쁜 아이들과 대화시간이 점차 줄어드는 대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원치 않는 아랫배가 점점 나오고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 노후준비는 아직 시작도 못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자라는 이유’로 하소연도 제대로 못하고 불안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년의 남자들이 많다.
불안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아니 불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불안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새로운 힘이 되고 이 에너지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 종교적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기분대로 살던 사람이 언젠가는 인생무상을 느끼며 불안해하다가 윤리적으로 살 결심을 하게 되고 결국은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고백론 첫 장에서 “주님,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했다. 결국 불안은 하느님 품안에서만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존재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 하느님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하늘의 새들도 먹여주신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시는 우리들에게야 오죽 하겠는가. 이 가을 필요 없는 불안에 마음 쓰기보다 주님이 허락하신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즐기는 건 어떨까. 풍요로움이 가득 찬 가을 들녘을 거닐며 은혜로운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주님이 내신 만물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우리 스스로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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