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입사 1년이 채 안된 막내 후배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둘 있다. 그 중 하나는 성당에 열심이다. 청년회 활동도 하고 주보도 밑줄을 그어가며 읽을 정도다. 식사 전 기도는 물론이고 사무실에서도 신앙에 관한 이야기 꺼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성당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신앙의 불꽃이 어떤 계기로 타올랐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보기 좋다.
다른 후배는 반대다. 오래 전 세례를 받았고 학창시절 주일학교도 열심히 다녔다는데 지금은 냉담 중이다. 사석에서도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나도 이 후배를 ‘술집’으로 초대한 일은 여러 번 있지만 ‘하느님 집’에 가보자고 한 적은 없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후배에게 성당가자고 먼저 손을 내밀 용기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가까운 후배지만 성당 가자고 이야기하기가 참으로 어렵고 쑥스러웠다. 다음은 후배의 일상이 바쁘고 고되다는 걸 알고 있어서다. 긴장의 연속인 사회부 막내 기자의 일상과 어쩌다 쉬는 일요일이면 잠에 지쳐 쓰러진 경험이 나도 있다. 게다가 업무지시를 내려야 할 선배가 신앙 이야기를 꺼내는 게 왠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 하는 행동 같았고 종교가 같다고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게 조직의 질서를 흐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철들어서 전교란 걸 해 본 기억이 없다. 그저 주일미사 빠지지 않는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인도 한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여겼다. 선교란 걸 어떻게 하는지 방법도 몰랐고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이웃의 고민과 행복까지 내가 보살필 여유가 어디 있냐는 무관심도 컸다. 미사때 마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미사 끝나는 ‘클로징 멘트’ 정도로 여겨왔던 게 사실이다. 부족한 내가 무슨 선교를 할 수 있을 까 하는 비관만 있었지 일단 마음먹으면 하느님이 도와 주실 것 이라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값싸고 맛있는 식당이나 유명한 병원은 주변에 소개한 적이 많지만 생명과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을 알리려는 노력은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다.
부활을 지낸 지금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준 사랑의 신비를 세상에 알릴 때다. 선교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선물하는 것이다. 나도 용기를 내서 냉담 중인 후배에게 성당 가자고 권해 볼 작정이다. 회사의 가톨릭 신자 동료들과 후배를 초청해 맛있는 저녁을 사 준 다음 생맥주 집으로 자리를 옮겨 “성당가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다. ‘마음의 정리가 안 됐다’는 등 예상되는 후배의 변명은 가톨릭 동료들과 말을 맞춰 사전에 차단할 것이다. 후배의 냉담을 되돌릴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뒤의 일은 하느님이 좀 도와주실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