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 탁희성 화백은 누구인가

 

1960년대 중반 이후 성화 작품에 심취

1915년 7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한 죽정 탁희성(비오) 화백은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은사인 석흑의보 선생 문하생으로 입문, 동양화를 전수하고 궁중화가 길에 들어섰다.

1960년 가톨릭에 귀의한 후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면서 매료된 탁 화백은 이로 인해 40년 동안 지켜온 자신의 사고와 화단(畵壇)을 혁신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4차례 개인전을 연 고인은 이후부터는 한국교회사 공부와 당시 풍속 및 복식에 대한 연구 등을 계속하면서 교회사 및 순교자 관련 성화 작품을 그리는 데 심취했다.

처음에는 고 오기선ㆍ박희봉 신부와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주교) 등의 도움을 받았으며 극작가 이서구 선생, 수도사대(현 세종대) 석우선 교수 등에게서는 사회 풍속과 복식에 관한 지도를 받았다.

탁 화백은 1970년 '천주교 박해 200년사 성미술전'(22점)을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 일대기 성화전'(1971년, 26점), '최양업 신부 일대기 성화전'(1976년, 30점),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화전'(1984년, 19점)을 개최한 데 이어 1989년에는 '한국 103위 성인들의 순교화전'을 열었다. 당시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장 김옥희 수녀 등의 도움을 받아 4년 간의 작업 끝에 순교성인 103위 특징적 면을 하나하나 조명해 103점으로 완성한 역작이었다.

그리고 다시 2년 간 작업 끝에 한국초기교회사 관련 순교자와 증거자들 삶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들이 이번에 본지를 통해 공개되는 208점 유작이다. 고인은 1992년 6월 28일에 선종했다.

탁 화백의 둘째 아들 탁동호씨는 "선친은 전국을 다니시며 현장을 답사한 후에 스케치한 것을 가지고 고증을 거친 후에 그림을 그리셨다"면서 "한번 자리에 앉으시면 팔이 펴지지 않을 정도로 꼼짝 않고 그림에 몰두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평화신문을 통해 유작들이 공개되는 것을 계기로 가톨릭에 귀의하신 후 순교성화에만 온 힘을 쏟으셨던 부친의 뜻이 새롭게 자리매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사 주요 사건. 순교자 삶 그려

 

어떤 그림들인가

이번에 연재하는 고 탁희성 화백 그림들은 고인의 둘째 아들 탁동호(시몬, 68)씨가 소장하고 있는 고인의 원본 작품들이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교회사 주요 사건들과 인물들, 특히 순교자들의 삶을 그들의 행적이나 직업 또는 순교 장면 등에서 특징적 면을 화제로 삼아 가로 58㎝ 세로 47㎝ 화폭에 담고 그 한쪽에 생애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아들 탁동호씨가 소장하고 있는 유작은 208점. 이 가운데 전시나 표구 등을 하기 위해 배접(褙接)을 댄 작품이 168점이고 배접을 대지 않은 원판 그대로 작품이 40점이다.

배접을 댄 168점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인 이벽(세례자 요한, 1745-1785)부터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인 하느님의 종 김사건(안드레아, 1794-1939)까지, 교회사 주요 사건이나 인물 또는 순교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그린 시기는 1991년 6월부터 7월사이다. 고인은 1992년 6월 28일에 선종했으니 선종하기 1년 전 두 달 동안에 혼신을 다해 그린 역작인 셈이다. 이 168점 가운데서 약 100점은 김옥희 수녀가 집필한 「시복시성을 기다리는 무명의 순교자와 증거자」(1996)와 「신유박해 순교자들」(2001)에 화보로 소개된 바 있다.

배접을 대지 않은 40점은 아직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로, 제1도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이득인부터 제40도 기해박해(1839) 순교자 한 안나와 김 바르바라에 이르기까지 여성 신자들만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고인의 마지막 작품들로 여겨지는 이 그림들은 모두 탁 화백이 선종하던 해인 1992년에 그린 것들이다.

전체 208점 가운데서 시복 대상인 하느님의 종 124위가 그려진 작품은 모두 모두 92점. 이 가운데 신유박해(1801) 순교자 강완숙과 최필공을 그린 작품이 2점씩이고, 1816년 순교자 고성대와 고성운은 한 작품으로 그렸다. 따라서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90위가 탁 화백 성화에 등장하는 셈이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 공적 집회(제1도).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 등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초기 교회사 관련 작품 168점 중 탁 화백이 제1도로 내세운 작품이다(1991년 7월 작)


 

 

 

 

 승자의 죽음(1-2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중 중 한 사람인 이벽(사도 요한, 1754-1786)이 고뇌하는 모습을 담았다(1991년 6월 작). 1785년 을사년에 명례방 집회 모임이 관헌들에 의해 발각돼 김범우가 귀양을 가서 장독으로 순교한다. 게다가 아버지와 종중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이벽은 두문불출한 채 지내다가 1786년 봄에 요절했다.

  


 

 
 

 북경에 가다(3도). 이승훈이 1783년 10월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가는 장면이다(1991년 6월 작). 이승훈(1756)은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였다.

 


 
 
 
 
 윤지충 (바오로)

 

천주교식 장례에 화를 내는 종친들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른 것을 안 종친들이 대노하고 있다.

 

 

 

 

 

 

 

 

 

 

 

 

 

 

평화신문은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이번 호부터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을 연재한다. 죽정 고 탁희성(비오, 1915-1992) 화백의 유작 성화들을 '하느님의 종 124위'를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신앙선조들의 믿음의 삶을 되새기고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기획이다. 한국 순교자들의 삶과 교회사 관련 성화를 그리는 데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고인의 미공개 성화 작품들을 처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은 고종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1787년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프란치스코), 이종사촌 권상연(야보고)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리고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유언대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대노케 했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조정에서는 진산 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자 진산 군수는 두 사람을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마침내 조정은 이들을 처형토록 했다. 윤지충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에서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윤지충은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첫 번째다.

 

 

 주문모 신부

 

최인길에게 세례를 주는 주문모 신부

 

 최인길에게 세례성사를 주다(제16도).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인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최인길(마티아)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중국 강남 소주부 곤산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북경교구 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 명령을 받은 주 신부는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어렵사리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주 신부는 한양에 도착, 계동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부활절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입국 사실이 탄로 나는 바람에 주 신부는 강완숙(골룸바) 집으로 피신했고 이후로는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펴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렇게 숨어 다니면서 성무를 집행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1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신자들이 연이어 체포돼 죽임을 당했다.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가슴 아파한 주 신부는 한때 중국으로 귀국을 결심했으나 순교하기로 다시 마음을 굳히고 관아에 자수했다.

주 신부는 1801년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죄인으로 목을 베고는 경계조로 그 목을 매달아 놓는 것)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주 신부는 하느님의 종 124위 중 두 번째다.

 

 

권상연 (야고보)

 

 

 위패를 찾는 관헌(제14도). 권상연(야고보, 1751~1791)이 신주를 없애 버렸다는 소식에 관헌들이 그의 집을 수색해 뒤뜰에 묻힌 위패를 찾고 있다.


 

권상연은 윤지충(바오로)의 외사촌 형으로,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는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했다. 1787년쯤이었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권상연의 고모) 상을 당하고 나서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이 유교식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도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사태가 확산되자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고 한다.

체포령을 피해 한동안 숨어 있던 권상연과 윤지충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했다.

전주 감영에서 두 사람은 갖은 문초를 겪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전라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윤지충에 이어 참수 순교했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권상연은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세 번째다.

 

 

  원시장 (베드로)

 

끝내 배교 않자 물 부어 얼어 죽게 해

 

 얼려 죽이다. 원시장(베드로, 1732~1793)이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자 얼려 죽이려고 형리들이 그의 온 몸에 물을 붓고 있다.
 

원시장은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출신으로, 1788~1789년쯤 사촌 형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입교했다. 그는 어느 날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곳에서 교리를 공부하면서 천주교 신앙이 보화임을 깨닫고는 집으로 돌아와 친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아직 세례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원시장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성격이 사나웠으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면서 온화한 성격으로 변했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해, 그의 이름은 관장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원시장은 포졸들에게 붙잡혀 홍주 관아에 끌려갔다. 관장의 갖은 문초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했으며 나아가 포졸과 형리들에게까지 전교했다. 그러던 차에 옥으로 찾아온 한 교우에게서 베드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홍주 관장은 아무리 해도 원시장이 배교하지 않자 형리를 시켜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게 했다.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자 마침내 그의 온 몸에 물을 부어 얼어 죽게 했다.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윤유일 (바오로)

 

주문모 신부 조선 입국 도와

 

 의주로 신부 영입(제15도) : 윤유일(바오로, 1760-1795)이 동료 지황(사바)과 함께 조선복장을 한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의주 관문을 몰래 빠져 나오고 있다.

 
 

윤유일은 1760년 경기도 여주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던 윤유일은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한 후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가족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

1789년 교회 지도층 신자들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기로 했을 때 밀사로 선발된 윤유일은 그해 10월 조선을 떠나 마침내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 머물면서 라자로회의 로(N. J. Raux) 신부에게 조건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은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은 후 귀국했고,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왔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1791년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으나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했다. 그러나 윤유일은 실망하지 않고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지 얼마 안 돼 신부의 입국 사실과, 또 윤유일과 지황이 신부 입국을 도왔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윤유일과 지황은 체포돼 최인길 등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했다. 마침내 윤유일은 맞아서 숨을 거뒀으며, 그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최인길 (마티아)

 

신부로 가장한 최인길(제12도)

 

 신부로 가장한 최인길(제12도) 포졸들이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고 최인길의 집에 들이닥치자 최인길이 주 신부를 가장해 붙잡히고 있다. 주 신부는 이미 신자들의 도움으로 피신한 후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마티아)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요한 세례자)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은 그의 동생이다.

최인길은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최인길은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이듬해 초 최인길이 마련한 집으로 왔다. 그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신부는 최인길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최인길은 주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체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인길의 신분이 드러났고, 놀란 포졸들은 다시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최인길은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신부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과 지황(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최인길과 윤유일, 지황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굳은 신앙에서 나오는 인내와 결의,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오히려 박해하는 자들을 당황케 했다.

포도청은 마침내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들을 때려 죽이기로 했다. 최인길은 윤유일, 지황과 함께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었다.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고, 당시 최인길의 나이 30살이었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지황 (사바)

 

신부를 영입하는 지황(제62도)

 

 신부를 영입하는 지황(제62도). 선교사 영입 운동에 가담한 지황이 국경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고 있다.

 

지황(사바, 1767-1795)은 한양의 궁중악사 집안 출신으로 천주교 소문을 듣고 자원해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973년 성직자 영입 운동 때 북경으로 가 구베아 주교를 만나기도 한 그는 국경에서 주문모 신부를 몰래 만나,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알려지면서 체포된 지황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매를 맞아 순교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이도기 (바오로)

 

천사가 전하는 말

 

 천주교를 믿는다고 옥에 갇힌 이도기가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전갈을 받는 환시를 보고 있다.


 

이도기(바오로, 1743~1798)는 충청도 청양 출신으로 배운 것은 없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이웃에게 권면했다. 박해를 피해 인근 정산에서 옹기를 구우며 지내던 그는 1797년 정사박해 때 체포됐다. 모진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했다. 해가 바뀌도록 옥에 갇혀 있던 그는 마침내 1798년 7월 24일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방 프란치스코

 

마지막 밥상

 

 방 프란치스코가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밥상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기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방 프란치스코(?~1799)는 충청도 면천 고을 여름이 마을(현재 충남 당진군 면천면 대티리)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면서 이듬해 홍주에서 체포된 그는 6개월 동안 고초를 겪다가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밥상을 받았을 때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교우 2명은 눈물을 흘렸으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리며 그들을 격려했다. 세 사람은 1799년 1월 21일 홍주 읍내에서 함께 순교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

 

줄로 목을 졸라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옥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은 충청도 홍주 면천 출신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원시보(야보고),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던 그는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했다가 면천 관아에 자수했다.

이후 홍주로 압송돼 온갖 형벌을 받았다. 매를 1400대 이상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마침내 옥졸은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1799년 4월 3일 그의 나이 30살가량이었다.

 

 

원시보 (야고보)

 

첩을 내보내다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지 못한 원시보가 집으로 돌아와 첩을 내보내고 있다.

 

 

 

 

 

 

 

 

 

 

 

 

 

원시보(야고보, 1730~1799년)는 충청도 응정리(현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출신으로 그의 나이 60살쯤인 1788~1789년에 사촌 동생 원시장(베드로)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했다.

1797년 정사박해 여파로 이듬해에 체포된 원시보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다 형벌을 받아 두 다리가 부러졌다. 1799년 덕산에서 청주로 이송돼 갖은 형벌을 받다가 마침내 그해 4월 17일(음력 3월 13일)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69살이었다.

 

 

정산필 (베드로)

 

백발의 회장(제76도)

 

 정산필 회장이 내포 지역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덕산 관아로 끌려가고 있다.


 

충청도 덕산 출신인 정산필(베드로, ? ~1799)은 성격이 강직하고 힘이 장사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아주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했다.

그는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주 신부를 찾아가 그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았다. 이후 내포 지역 회장으로 임명되자 열심히 기도하고 독서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1797년 정사박해 여파로 1798년 혹은 1799년에 체포돼 덕산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옥에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다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799년, 그의 나이 50살 내지 60살이었다.

 

 

배관겸 (프란치스코)

 

강당을 마련(제60도)

 

 배관겸이 양제 마을에서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자 강당을 만들고 있다.


 
배관겸(프란치스코, ?~1800)는 충청도 당진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돼 입교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체포됐으나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됐다. 그러나 즉시 죄를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고, 고향에서 멀지 않은 면천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에서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정사박해가 충청 지역을 휩쓸던 1798년 10월 3일 양제 마을에서 배교자의 밀고로 붙잡힌 그는 홍주로 압송됐다가 다시 청주 병영(兵營)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로 형벌을 받았으나 영웅적 인내로 참아내다 마침내 순교했다.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로, 그의 나이 60살가량이었다.

 

 

인언민 (마르티노)

 

역참에서 역참(제59도)

 

 고문으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인언민을 포졸들이 말에 실어 해미로 압송하고 있다. 
  

인언민(마르티노, 1737~1800)은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황사영(알렉시오)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듣고 교리를 배운 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그는 공주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청주로 압송됐다가 다시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로 이송됐다. 그러나 이미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걸을 수조차 없어 조정 관리들이 이용하던 말을 타고 가야만 했다.

해미 옥에서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지내던 그는 '때려죽이라'는 관장 명령을 받은 형리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고 돌로 가슴을 맞아 결국 순교했다.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이었고 그의 나이 63살이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

 

장살(제58도)

 

 포졸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이보현을 장터로 끌고나가 죽도록 매질하고 있다.


 

이보현(프란치스코, 1773~1800)은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성격이었으나 20살이 넘어 황심(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에는 성격을 고쳤다고 한다. 모친 권유에 따라 결혼한 그는 연산으로 이주해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정사박해(1797)가 일어난 지 한두 해가 지나 연산에서 붙잡힌 그는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로 이송됐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던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장터로 끌려 나가 죽도록 매를 맞았다. 그래도 숨을 거두지 않자 망나니들은 몽둥이로 그의 불두덩을 짓찧어 죽였다.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조용삼 (베드로)

 

두 아들을 데리고(제57도)

 

 병약한 조용삼이 동기의 부축을 받으며 아버지를 따라 의지처를 찾아 나서고 있다.

 

 

 

 

 

 

 

 

 

 

 

 

 

조용삼(베드로, ?~1801)은 경기도 양근 태생으로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병약하고 용모도 볼품없어 서른 살이 되도록 혼례도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서 살게 됐는데 이때 천주교에 대해 듣고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어 교리를 배웠다.

아직 예비신자였던 1800년 4월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나 포졸들이 아버지를 볼모로 삼고 모질게 매질하자 결국 배교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마르티노)의 권면을 받고는 즉시 관청으로 들어가 다시 신앙을 고백했고 경기도 감영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그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1801년 3월 27일(음력 2월 14일)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에서 숨을 거뒀다.

  

 

최창현 (요한)

 

판관에게 호교문을

 

 옥에 갇힌 최창현이 천주교 교리가 진리임을 알리는 내용의 호교문을 쓰고 있다.

 

 

 

 

 

 

 

 

 

 

 

 

 

 

최창현(요한, 1759~1801)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5년에 순교한 역관 최인길(마티아)이 집안 아저씨뻘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했고, 그가 번역한 책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총회장에 추대된 그는 탁월한 교리 강론과 뛰어난 덕망으로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정식으로 회장에 임명돼 활동하던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포도청을 거쳐 의금부로 끌려갔다. 그는 처음에는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했으나 뉘우친 후 자신이 '천주교 우두머리임'을 밝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나이 42살이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뛰어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알기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 요지’를 쓴 정약종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장으로서 초기 한국교회에 큰 기여를 했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경기도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성 유조이(체칠리아)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성 정하상(바오로), 성 정정혜(엘리사벳)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됐으며, 세례 후에는 교리를 연구하고 가족을 가르치는 데 전심했다. 오랜 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했는데 이 책은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됐다.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정약종을 초대 회장에 임명하기도 했다.

정약종은 1801년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됐으며,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교만이 주문모 신부가 도피하면서 준 성물들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 (※ 기록에 따르면, 홍교만은 사돈인 정약종에게서 성물 등을 맡아 보관했다. 따라서 주 신부의 성물을 보관했다는 이 그림 내용은 작가의 착오로 추정된다.-편집자)

 

 

홍교만(1738~180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한양 출신으로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는 고종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됐으며,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은 후 열심히 교리를 연구하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사돈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기도 한 홍교만은 결국 발각돼 체포됐다. 그는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정약종과 홍낙민(루카)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63살이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레오)은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은 그의 사위다.

 

 

최필공 (토마스)

 

보배로운 피

 

 최필공이 형장에서 칼을 맞았다. 첫 번째 칼이 목을 비켜가자 손에 흐르는 피를 보면서 "보배로운 피"하고 외치고 있다.

 

 

최필공(토마스, 1744~1801)은 한양의 의원 집안 출신으로 1790년 사촌동생 최필제(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입교하자마자 최필공은 교리 실천에 큰 열성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된 그는 목석과 같이 굳게 신앙을 고수했지만, 정조 임금까지 나서는 유혹에 결국 굴복하고 석방됐으며, 평안도 지방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됐다.

그러나 마음에 여전히 천주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최필공은 3년 후 심약 자리를 사양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1799년에도 체포됐으나 정조의 명령으로 풀려난 그는 신유박해가 정식 시작되기 전인 1800년 12월 17일(음력)에 다시 체포돼 마침내 서소문 밖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그의 나이 57살이었다.

 

 

홍낙민 (루카)

 

 

 홍낙민이 동료들과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홍낙민(루카, 1751~1801)은 충청도 예산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88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들어섰다. 이에 앞서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박해 때면 천주교 신앙을 멀리했다가 다시 실천하기를 반복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용기를 내어 재판관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홍낙민은 마침내 사형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그의 나이 50살이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관장과의 대화(제69도)

 

 옥에 갇힌 최창주가 신자를 밀고하라는 관장의 강요에 '천주교에서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어 한 사람도 고발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는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됐을 때 배교하고 석방됐다.

이후 그는 죄를 깊게 뉘우치고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했으며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두 딸 중 한 명은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요한)의 아내이고, 다른 한 명은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베드로)의 며느리로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바르바라)다.

여주 지방에서 1800년 부활대축일에 박해가 일어나 체포된 최창주는 여주 감옥에 갇혔다가 경기 감영으로 끌려갔고,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사위 원경도와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여주로 압송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이었다.

 

 

이중배 (마르티노)

 

진료의 기적(제71도)

 

 이중배가 여주 관청에서 옥중생활을 하며 의술로 사람들을 진료하고 있다.

 

 

이중배(마르티노, ?~1801)는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797년이었다. 그는 사촌인 원경도(요한)와 함께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요사팟)에게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했고, 이후 교회의 지시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1800년 부활 대축일에 그는 사촌 원경도와 함께 동료 집으로 가서 부활삼종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게 됐는데 사람들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돼 여주 관청에 끌려갔다. 그는 6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면서 의술로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해 10월 경기감영으로 이송됐다가 이듬해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고향 여주에서 참수 순교했다.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이었고, 그의 나이 50살가량이었다.

 

 

원경도 (요한)

 

부활 축일(제68도)

 

 1800년 부활 대축일에 원경도가 축일을 지내러 동료 집으로 가고 있다. 그림 탁희성 화백  

 

 

 

 

 

 

 

 

 

 

 

 

 

 

 

 

 

원경도(요한, 1774~1801)는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97년 사촌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 후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마르첼리노) 딸을 아내로 맞았다.

1800년 부활 대축일에 요한은 마르티노와 함께 동료 집에서 성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내게 됐는데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여주 관장에게 들켜 체포됐다. 요한은 여주 관아 옥에서 동료들과 6개월 이상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낫곤 했다고 한다. 1800년 10월 요한과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됐고, 이듬해에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요한은 다시 여주로 압송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윤유오 (야고보)

 

형장으로 압송

 

 사형 선고를 받은 윤유오(야고보)가 형장으로 압송되고 있다.

 

 

윤유오(야고보, ? ~1801)는 경기도 여주 점돌(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이 형이다. 일찍부터 형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유오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된 윤유오는 그곳 관아로 압송됐다. 갖가지 문초와 형벌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그는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최필제 (베드로)

 

약방 집에서 잡힘(제19도)

 

 최필제(베드로)가 자기 집에서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 포졸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최필제(베드로, 1770~1801)는 한양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생활했다. 1801년에 순교한 최필공(토마스)의 사촌 아우로, 1790년에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본래 진실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녔던 베드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질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최필제는 사촌인 최필공과 함께 체포됐으나 신앙이 굳지 못해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됐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 일을 도왔다. 신입 교우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1800년 12월 19일(음력)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 체포된 최필제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차례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로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윤운혜 (루치아)

 

제사를 피해 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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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부모가 조상제사를 강요하자 윤운혜(루치아) 부부가 견디다 못해 서울로 피하고 있다. (이 그림은 초기 천주교 여성들 생활상을 그린 탁희성 화백의 미공개 작품 40점 가운데 하나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윤운혜(루치아, ~1801)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다. 어머니 이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운혜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바르나바)와 혼인했으나 시부모가 비신자였다. 시부모가 조상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라며 거부하던 루치아는 결국 1799년쯤 남편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루치아 부부는 한양에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집 마당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고 교우들 모임 장소로 제공하는 등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그해 2월 체포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의 배교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5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남편과 언니 윤점혜(아가타) 역시 신유박해 순교자들이다.

 

 

정복혜 (칸디다)

 

사학매파

 

 부녀자들에게 사학(천주학)을 퍼뜨린 죄로 형조에 갇힌 정복혜 칸디다.

 

신자들 사이에 '정 과부'로 알려진 정복혜(칸디다, ? ~1801)는 한양 근처에 살던 양인 집안 출신으로 혼인한 뒤 한양에서 살았다. 1790년 무렵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이후 칸디다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면서 친정 오빠와 아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과부가 된 후에는 한신애(아가타),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교우들이 만든 교회 서적을 팔기도 했다. 교우들과 함께 모여 교리를 강습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노력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복혜는 우선 성물과 서적들을 한신애 집으로 가져다 숨겨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해 2월 붙잡혀 형조로 압송됐고, 모진 문초와 형벌에 잠시 흔들리기도 했으나 곧 뉘우치고 자신이 한 일을 떳떳이 고백했다. 마침내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인혁 (타대오)

 

태장

 

 정인혁(타대오)은 혹독한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정인혁(타대오, ? ~1801)은 한양 중인 집안 출신으로 약방을 운영하며 생활하다가 1790년 무렵 최필제(베드로)에게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 가르침을 따르고자 제사도 폐지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형제들과 함께 체포돼 형조로 압송된 정인혁은 형벌에 굴복한 형제들과 몇몇 동료들과 달리 끝까지 신앙을 고백했지만 가족에 의해 풀려났다. 가족들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받았지만 그는 최필공(토마스), 김이우(바르나바)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 공부에 몰두했다.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원이 돼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했으며, 한글로 번역한 교회 서적들을 교우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정인혁은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다 최필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철상 (가롤로)

 

옥중 아버지를 공경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 정약종과 숙부들이 옥에 갇히자 정철상(가롤로)이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


 

정철상(가롤로, ?~1801)은 경기도 광주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동생들이다.

정철상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의 나이 20살가량이던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해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돼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그는 부친이 순교하던 4월 8일 체포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나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철상은 한 달 이상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했다.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심아기 (바르바라)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심아기가 어머니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바르바라, 1783~1801)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신자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성인들 모범에 감동해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며, 이후 조용히 집안에서만 지내면서 모범적으로 교회 법규를 지켜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된 후 심아기에게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그는 어머니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라고 말한 뒤, 자진해 그들 앞으로 나아가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한양으로 끌려간 심아기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1801년 4월 초 나이 18살에 순교했다.

 

 

강완숙 (골롬바)

 

남편과 헤어져 한양으로

 

 강완숙이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상경하고 있다.

 

 

 

 

 

 

 

 

 

 

 

 

 

 

 

 

 

강완숙(골롬바, 1761~1801)은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완숙은 얼마 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됐다.

이후 강완숙은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옥에 갇히기도 했다. 또 시어머니와 전처 아들 필주(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그러나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강완숙은 한양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시어머니와 아들과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해 신자들과 왕래하며 살았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골롬바는 주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했다. 주 신부는 강완숙을 여회장으로 임명, 신자들을 돌보게 했다.

 

은언궁에 전교(제17-도)

 

 강완숙이 왕실인 은언궁 송씨를 찾아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하고 있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골롬바, 1761~1801)은 자기 집을 주 신부 피신처로 내놓았다. 이후 강완숙은 주 신부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했고 그때마다 그 집은 집회 장소로 이용됐다. 그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 여러 사람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왕실 친척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완숙 덕택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즉시 관청에 고발됐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박해자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완숙은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김현우 (마태오)

 

빛의 십자가

 

 김현우가 포졸들에게 붙잡혀 옥에 끌려갈 때 찬란한 빛의 십자가가 나타나 앞길을 비추고 있다.

 

김현우(마태오, 1775~1801)는 한양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쯤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김이우(바르나바)는 그의 친형이다. 맏형 김범우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현우는 1785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김범우가 유배를 당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였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몰래 기도생활을 계속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이후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한 김현우는 형 김이우와 함께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현우는 형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가 체포됐을 때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는 형조로 이송돼 사형선고를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 8명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김연이 (율리안나)

 

궁녀들의 묵주신공

 

 김연이가 폐궁인 양제궁에서 궁녀들과 함께 묵주신공을 바치고 있다.

 

김연이(율리안나, ?~1801)는 양인 출신 부인으로, 한양에 살 때에 한신애(아가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자주 교리 강습이나 미사에 참석하면서 신심이 깊어진 김연이는 '천주교의 매파'(媒婆: 중매인 노파)라고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했다.

복음 전파에 노력하는 동안 김연이는 왕실 친족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수산나) 등이 거처하던 폐궁 양제궁에 자주 드나들며 그들을 주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게 안내하기도 했다.

1800년 12월 박해가 시작되자 김연이는 강완숙 회장 부탁을 받고 김계완(시몬)을 자신의 집에 숨겼다. 이듬해 초 공식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는 황사영(알렉시오)이 피신해 왔다. 이로 인해 김연이 자신도 위험에 처하게 됐고, 결국 체포됐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는 김연이는 강완숙ㆍ강경복ㆍ한신애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현 (안토니오)

 

형장으로 가는 우차

 

 이현을 실은 소달구지가 형장으로 향하고 있다.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안토니오, ?~1801)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 서적을 얻어 보고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됐다. 그 후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요사팟)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한양 홍필주(필립보)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후 같은 교우인 홍익만(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했고, 이로써 홍필주와 동서 사이가 됐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현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으며, 곧 포도청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됐다.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겠다고 대답했으나 곧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는 신앙을 굳게 지켜 순교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에는 박해자들이 아무리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이현은 갇혀 있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최인철 (이냐시오)

 

의주에서 신부 영입(제30도)

  

 최인철이 의주 변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고 있다.

 

한양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이냐시오, ?~1801)은 교회 창설 초기 형에게서 교리를 배워 열심인 신자가 됐다.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이 형이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최인철은 형과 함께 체포돼 형조로 끌려갔을 때 갖은 협박과 회유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가 노모와 형제들의 호소, 임금의 회유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석방됐다.

그러나 잘못을 깊이 뉘우친 최인철은 형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했다. 특히 형 최인길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 영입을 위해 힘썼으며, 결국 체포돼 1795년에 순교했다. 형이 순교한 뒤 최인철은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면서 주문모 신부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피신을 돕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최인철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관리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가면서 그것이 진리임을 역설했다. 최인철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한신애 (아가타)

 

많은 성물

 

 포졸들이 한신애 집에 숨겨져 있던 성물들을 찾아내고 있다.

 

한신애(? ~1801, 아가타)는 충청도 보령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장성한 뒤 한양 조례산의 후처로 들어가 살았다. 1795~1796년쯤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전교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그는 입교 후 교회 일을 도우면서 1800년 여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한신애는 그 동안 다른 가족과 종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김연이(율리안나)를 비롯해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으며, 강완숙과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정복혜가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거둬 오자 아가타는 이를 자기 집 곳간에 숨겨뒀다. 그러나 얼마 안 돼 그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한신애는 형조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굳게 지키며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마침내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윤점혜 (아가타)

 

남장을 하고

 

 윤점혜가 동정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한양을 향하고 있다.

 

윤점혜(아가타, ?~1801)는 1778년쯤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동생이다.

윤점혜는 일찍부터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자 동정 생활을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풍속으로 용납되지 않자 남장을 하고 윤유일의 집에 가서 숨어 지내다 다시 어머니에게 갔다.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 소식을 들은 윤점혜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옮겨가 살면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켰으며,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강완숙의 집에 가서 생활하면서 주 신부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지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체포된 윤점혜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양근으로 이송된 후 마침내 1801년 7월 4일 순교했다. 순교 당시 그의 목에서는 우유 빛이 나는 흰색 피가 흘렀다고 한다.

 

 

정순매 (바르바라)

 

머리를 올리고(제32도)

 

 정순매(바르바라)가 동정을 지키고자 신분을 위장해 거짓으로 머리를 올리고 있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정순매(바르바라, 1777~1801)는 18살 때에 오빠 정광수(바르나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윤운혜(루치아)가 올케로, 모두 신유박해 순교자들이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열심히 교리를 실천한 정순매는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주위에는 '허가와 혼인했다가 과부가 됐다'고 말하면서 과부 행세를 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정순매는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하며 윤점혜(아가타)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1800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에 정진하다 이듬해 신유박해 때 체포, 불굴의 용기로 신앙을 증언하다 1801년 7월 3일(혹은 4일) 여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김이우 (바르나바)

 

장사

 

 맏형이자 이복형인 김범우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이우는 모진 형벌 끝에 포도청에서 장사로 순교했다.


 

김이우(바르나바, ?~1801)는 한양 명례방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1786년쯤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가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마태오)는 그의 아우다.

이복형 김범우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맏형이 유배를 가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후에는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주 신부가 박해 위험으로 피신하려 할 때 자기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우 김현우와 함께 체포된 김이우는 포도청에서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거듭되는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 그러다가 결국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했는데, 이때가 1801년 5월쯤이었다.

 

 

  이국승 (바오로)

 

대중에게 설교

 

 이국승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대중들에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이국승(바오로, 1772~1801)은 충청도 음성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장성한 뒤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된 그는 경기도 양근으로 권일신을 방문,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는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교에 이를 만큼 신앙이 굳지는 않았던지 1795년 을묘박해 때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석방됐다.

잘못을 뉘우친 이국승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자 동정을 지키기로 했다. 혼인을 재촉하는 부모 성화를 피해 한양으로 이주한 그는 최창현(요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리를 익히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옥으로 끌려간 이국승은 황해도 출신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는 것을 보고 권면했고, 고광성은 그에게서 힘을 얻어 순교했다. 이국승 또한 형벌과 문초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유혹에 빠지기도 했으나 마침내 1801년 7월 2일에 사형판결을 받았다. 며칠 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돼 순교했으니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김광옥 (안드레아)

 

면장

 

 면장을 보고 있는 김광옥. 그는 불같은 성격으로 이웃들이 무서워하였으나 50살 쯤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이전의 성격을 모두 고쳤다.

 

충청도 예산 여사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안드레아, ?~1801)은 오랫동안 그 지방 면장(面長)을 지냈다. 그는 50살쯤 됐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광옥은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숨어 지내다가 함께 체포됐으며 마침내는 한양으로 압송돼 8월 21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해 참수하라'는 명령이었다. 충청도로 내려온 그들은 헤어질 시간이 되자 서로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튿날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간 김광옥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살가량이었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이 그의 아들이다.

 

 

최여겸 (마티아)

 

처가집에서 잡혀(제82도)

 

 최여겸(마티아)이 신유박해 때 충청도 한산의 처가에 피신해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있다.

 

전라도 무장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마티아, 1763~1801)은 일찍이 윤지충(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결혼한 뒤에는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됐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여겸은 일단 충청도 한산에 있는 처가로 피신했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해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 최여겸은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된 후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됐다. 최여겸은 무장에서 문초를 받은 후 굴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됐으며, 전주 감영에서는 열심한 신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과 김천애(안드레아)를 만났다.

최여겸과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은 후 마침내 고향에서 사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최여겸은 고향 무장으로 이송돼 그곳 개갑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김종교 (프란치스코)

 

약방에서(제83도)

 

 중인 출신으로 의원인 김종교는 신유박해 때 체포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했다.


 

김종교(프란치스코, 1754~1801)는 한양 중인 집안 출신 의원이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학문에 대한 취미가 남달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인 이벽(요한)이 그를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에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종교는 처음에는 드러나게 활동하지 않다가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 초 최인길(마티아)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난 뒤 '프란치스코' 세례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해 여름에 일어난 을묘박해로 체포됐을 때 마음이 약해져 석방됐다.

집으로 돌아온 김종교는 즉시 신앙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동료들과 신앙 공동체를 이뤄 교리를 공부하는 한편,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체포된 김종교는 형조로 이송된 후 갖가지 혹형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고백했고,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홍필주(필립보)와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홍필주 (필립보)

 

복사(제34도)

 

 홍필주는 어머니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집에 모신 이후 주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며 교회 일을 도왔다.


 

홍필주(필립보, 1774~1801)는 충청도 덕산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90년쯤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아버지는 본래부터 천주교 신앙을 싫어했지만 계모 강완숙(골룸바)은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을 실천했고 홍필주는 어머니를 모범으로 삼아 배웠다.

1791년 신해박해를 겪은 후 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한 홍필주는 1795년 어머니가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주 신부 복사로 일을 했다. 또 홍익만(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된 홍필주는 혹독한 형벌에 마음이 차츰 약해져 갔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면을 받고 마음을 돌이켜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했다. 어머니가 순교한 후 마침내 홍필주는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윤지헌 (프란치스코)

 

신부 영입 위한 여비를 받으며

 

 윤지헌이 유항검 등에게서 신부 영입을 위한 여비를 받고 있다.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은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 형으로, 윤지헌은 1789년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로 형이 순교하자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윤지헌은 가족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교회 서적을 베껴 읽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키곤 했다. 1795년에는 저구리를 방문한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이후에는 교회 밀사 황심(토마스)을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했다.

윤지헌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전주감영 옥에 갇혔다.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그는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시 전주로 이송돼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의 이별

 

 유중철이 신유박해 때에 포졸들에게 잡혀가며 아내와 이별하고 있다.

 

유중철(요한, 1779~1801)은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교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부친이고, 유문석(요한)이 동생이다. 아버지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성장한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에게서 오랫동안 글을 배워 학식도 갖췄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첫영성체를 한 유중철은 이때부터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2년 후 한양 이순이(루갈다)에게서도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주 신부는 두 사람의 혼인을 주선, 1797년 10월 혼사가 성사됐다.

이듬해 9월 유중철은 아내와 함께 부모 앞에서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유혹이 생길 때마다 두 부부는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해 나갔다.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돼 전주 옥에 갇힌 유중철은 그해 가을 동생 유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에게 쪽지를 써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유문석 (요한)

 

형의 옥바라지

 

 형 유중철(요한)이 옥에 갇히자 유문석이 형의 옥바라지 심부름을 하고 있다.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유문석(요한, 1784~1801)은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형이며, 이순이(루갈다)는 형수가 된다.

유문석은 부친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자랐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유문석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에서는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고 이어 형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돼 전주 옥에 갇혔다.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유문석은 여름 내내 전주 옥사를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그러다 9월 중순쯤 유문석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유문석은 형 유중철과 함께 그해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교수형을 받았다. 17살이었고 미혼이었다.

 

 

현계흠 (바오로)

 

영국 배에 올라

 

 현계흠이 부산 동래에 내려왔다가 영국 군함을 방문하고 있다.

 

'

사수' 또는 '계온'이라고도 불린 현계흠(바오로, 1763~1801)은 한양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역관을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으나 그는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에 순교한 성 현석문(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성녀 현경련(베네딕타)의 아버지다.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현계흠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교회 일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주 신부에게는 자기 집을 피신처로 내주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단체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자 비밀 집회소인 '6회'의 하나였다.

1797년 9월, 현계흠은 경상도 동래 지방에 갔다가 마침 그 지역에 나타난 영국 배를 방문하고는 상경한 뒤 황사영(알렉시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줬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던 현계흠은 자기로 인해 온 일가친척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 쯤 포도청에 자수했다. 그는 의금부로 이송된 후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38살이었다.

 

 

김사집 (프란치스코)

 

엄동설한의 180리길

 

 

 김사집이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까지 180리 길을 사흘 동안 걸어서 압송되고 있다.

 

'성옥'이라고도 불리던 김사집(프란치스코, 1744~1802)은 충청도 덕산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반 집안 출신으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는 학문을 버리고 교리 실천에 노력했다. 그는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으로 복음 전파에 많이 기여했다. 또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해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된 김사집은 덕산 관아로 압송돼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해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라.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해 10월 해미로 이송돼 치도곤 90대를 맞은 김사집은 2개월 후 다시 청주 병영으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했다.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그의 나이 58살이었다.

 

 

이경도 (가롤로)

꼽추

 

 이경도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됐지만 몇몇 교우들과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어릴 때 '오희'(五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경도(가롤로, 1780~1802)는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조선 중기 학자 이수광의 8대손이자 실학자 이익의 외손자였다. 또 모친은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루갈다)와 1827년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의 동생들이다.

이경도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됐지만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했다. 1793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남인 그는 지혜를 발휘해 교회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는 되도록 미신자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최필공(토마스), 홍재영(프로타시오) 등 몇몇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익히곤 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서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경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홍익만 (안토니오)

 

비밀통로

 

 홍익만은 한양 집에 비밀통로를 뚫어 신자들을 도왔다.  

 

 

 

 

 

 

 

 

 

 

 

 

 

 

 

 

 

 

홍익만(안토니오, ?~1802)은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해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김범우(토마스)에게서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연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796년 사위 홍필주 집에서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신부를 방문해 성사를 받았다. 또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였다.

홍익만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산과 여주 등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떳떳이 고백했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니,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홍인 레오

 

부자가 잡혀감(제93도)

 

 홍인과 부친 홍교만이 포천 집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돼 압송되고 있다.

 

 

홍인(레오, 1758~1802)은 경기도 포천에서 자랐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부친이다. 부친 홍교만은 1771년쯤 양근에 살던 고종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웠고, 홍인은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홍인은 천주교에 입교한 뒤 세속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리고 입교를 망설이는 부친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홍인은 부친과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친과 함께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도 노력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집안에 숨겨둔 것이 발각되면서 홍인은 부친과 함께 체포됐다.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돼 얼마 후 형벌을 받고 순교했다. 홍인은 포천으로 압송됐다 경기 감영을 거쳐 한양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은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향 포천으로 이송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2년 1월 30일,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유중성 마태오

 

숲저이 형장 (제37도)

 

유중성이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 순교할 준비를 하고 있다.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마태오, ?~1802)은 전라도 전주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랐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사촌 형제들이다.

작은 아버지 유항검과 그 가족들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유중성은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돼 전주 옥에 갇혔다.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돼 석방됐지만 유중성은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처음에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가던 중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쳐 다시 체포된 그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사촌형수 이순이 등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18살가량이었다.


김진후 비오

 

옥중신공 (제111도)

 

김진후(비오)가 옥중에서 기도를 바치면서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고 있다.


 

김진후(비오, 1739~1814)는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돼 있다.

김진후는 50살쯤 됐을 때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들은 맏아들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접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천주교 교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을 얻게 되자 맏아들을 비롯한 자식들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그러나 자식들의 꾸준한 노력에 점차 회심하게 됐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생활에 열성과 모범을 보였다.

김진후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처음으로 체포된 이후 네댓 차례나 체포됐으나 그때마다 풀려나곤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도 체포됐다 유배형을 받았지만 곧 해배됐다. 1805년 다시 체포돼 해미로 압송된 그는 이때부터 관장 앞에서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당시 박해가 공식적이 아니어서 그는 사형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옥중에서 지냈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김진후는 오랜 옥중 생활 끝에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75살이었다.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자수 (제137도)

 

김윤덕이 배교 후 감영을 나서다 김종한(안드레아)에게서 권면을 받고 있다.


 

경상도 상주 은재(현 경북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 ?~1815)은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했다. 이후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함께 살았다.

김윤덕은 1815년 봄 교우들과 함께 부활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 여러 차례 문초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고백한 김윤덕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해 배교했다.

김윤덕은 감영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돼온 김종한(안드레아)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권면을 받으면서 신앙이 다시 살아나 감영으로 되돌아가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다.

관장은 그를 실성한 사람으로 몰아 내쫓았으나 김윤덕은 다시 들어와 거듭 신앙을 고백했고, 마침내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모진 매를 맞았다.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끌려갔는데 옥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15년 4월 말 혹은 5월 초로 그의 나이 50살 가량이었다.

 

 

김시우 알렉시오

 

감사를 희롱 (제130도)

 

김시우가 대구 감영에서 불구인 자신을 동정하는 감사에게 오히려 천주교 신앙을 권고하고 있다.


 

김시우(알렉시오, 1782~1815)는 1782년 충청도 청양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착하고 어진 성품이었으나 오른쪽 몸이 불편해 결혼할 수가 없었고, 일하기가 어려워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했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알렉시오는 열심히 신자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가난해서 교우들의 애긍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김시우는 고향을 떠나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했다.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원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 뒤를 따라갔다.

김시우는 안동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대구로 압송됐다. 대구에서 턱이 부서지는 혹독한 형벌을 받은 그는 음식을 먹을 수도, 구할 수도 없는 처지로 지내다가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로 옥사했다. 1815년 5월 혹은 6월로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최봉한 프란치스코

 

최봉한 프란치스코 장에 맞아 (128)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된 최봉한은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교했다.

 

 

 

 

 

 

 

 

 

 

 

 

최봉한(프란치스코, ?~1815)은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공주 무성산으로 옮겨가 살던 중 주문모 신부 입국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했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집에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최필공(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모친 사망 후 시골로 내려간 그는 친척들 권유로 혼인했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안드레아)과 구성열(바르바라) 부부가 그의 장인과 장모다.

그 후 최봉한은 가족들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던 중 1815년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 다시 대구로 이송됐다.

최봉한은 대구에서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돼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며,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교했다. 18155월쯤(음력)이었고, 그의 나이 30살이 갓 넘었을 때였다.

 

 

서석봉 안드레아

 

 

두메산골서 잡혀옴(128)

서석봉을 비롯한 교우들이 청송 노래산에서 포졸들에게 붙잡혀 경주로 압송되고 있다.

 



 

 

 

 

 

 

 

 

 

 

 

 

 

 

 

 

서석봉(안드레아, ?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훗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서석봉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과부 구성열과 혼인한 후 사위 최봉한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1815년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

경주에서 문초를 받은 후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서석봉은 대구에서도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참아내며 신앙을 지켰다.

서석봉은 18151118(음력 1018)에 동료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형벌로 쇠약해져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사하고 말았다.

 

 

이경언 바오로

 

주님 앞으로

 

교우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인 이경언이 한 과부에게 권면하고 있다.

 

 

 

 

 

 

 

 

 

 

 

 

 

 

'종회' 혹은 '경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경언(바오로, 1792~1827)은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 태생이다.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인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고, 어머니는 교회 설립에 기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가롤로)가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루갈다)가 누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형과 누나가 순교한 후, 경언은 어머니와 형수와 함께 지내다 22살에 혼인했다. 그는 언제나 냉담교우를 권면하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미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 주려고 노력했다. 경언은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서적이나 상본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북경 왕래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 주는데 노력했으며,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후 전주 관아에 고발된 그는 전주에서 한양까지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돼 포도청으로 압송됐다가 조정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됐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는 혹독한 형벌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1827627(음력 윤 54)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박경화 바오로

 

승려와 종교토론

 

박경화가 대구 감영에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도항'이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알려진 박경화(바오로, 1757~1827)는 충청도 홍주 양반 집안 태생으로 33살 쯤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가 아들이다.

박경화는 입교 얼마 후 박해로 체포됐는데 마음이 약해져 석방됐다. 하지만 이후 더욱 철저히 신자 본분을 지켜나갔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 후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는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려고 노력하는 등 모범을 보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해 간 그는 그해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체포됐다.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된 박경화는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늙은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고 보살펴 주었다.

상주에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전혀 굽히지 않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그는 관장 명령에 따라 승려와 토론을 벌였는데 설명에 막힘이 없어 관리들조차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새 감사 부임 후 다시 형벌을 받은 박경화는 노령에다 여러 차례 형벌로 몸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선종했다. 18271115(음력 927) 그의 나이 70살이었다.

 

 

김세박 암브로시오

 

식구의 반대

 

 

 

'군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세박(암브로시오, 1761~1828)은 한양 역관 집에서 태어났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지만 가족들이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심하게 방해하면서 천주교를 욕하기까지 했다.

김세박은 할 수 없이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았다. 그는 가끔 산중에 들어가 살면서 신심을 함양하는 데 열중하곤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세박은 수색을 피할 길이 없음을 알고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라고 자백했다. 한 달 후 대구로 이송된 그는 이재행(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김세박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인근 주민들에게서 거둔 세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는 음식을 전폐키로 작정하고 철저히 대재(大齋)를 지켰다. 함께 있던 교우들이 똑같이 하려 하자 그는 자살 행위라고 만류하고는 그제야 음식에 손을 댔다고 한다.

김세박은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옥중생활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123(음력 1027) 옥사했다. 그의 나이 67살이었다.

 

 

안군심 리카르도

 

명랑하고 겸손한 성품인 안군심은 교회 서적을 베끼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리카르도, 1774~1835)은 청년기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해 살면서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명랑하고 겸손하며 친절한 그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쳐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지냈다. 아이들 교육에도 정성을 다했다.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으며, 1주일에 세 번씩은 대재를 지켰다.

한번은 포졸들에게 체포돼 관장 앞에 끌려나갔는데 모호한 대답으로 석방됐다. 이후 그는 그때 분명하게 신앙을 드러내지 못한 것과 용기가 부족했던 것을 후회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안군심은 언젠가는 자신도 체포될 것을 예상하면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돼 상주 관아로 끌려 갔다. 모진 형벌에도 배교하지 않아 대구로 이송된 그는 또 극심한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은 안군심은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박사의 안드레아

 

기구로 병환을

 

. 박사의는 감옥에서도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안드레아, 1792~1839)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현 홍성) 양반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신앙 속에 자란 박사의는 모범적 신앙생활과 지극한 효성으로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후 그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했다.그해 4월 그믐께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상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대구 감영으로 압송됐다.

대구 감영에서 노령인 아버지가 차츰 쇠약해지자 효성 지극한 박사의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아버지 박경화는 노령으로 형벌을 끝까지 견뎌내지 못하고 1827년 옥중에서 순교했으나 박사의는 12년 동안 더 감옥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526일 마침내 김사건(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7살이었다.

 

 

김사건 안드레아

 

줄톱질

 

 

김사건은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의 영예를 안았다.

충청도 서산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안드레아, 1794~1839)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타대오)가 아버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시몬)는 큰아버지다.

집안은 본래 부유했지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재산을 버리고 전라도 고산, 경상도 진보, 강원도 울진 등지로 피신해 다니느라 가난해졌다. 김사건은 1815년 을해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뒤 마음이 약해져 석방됐다.

아버지가 유배 당한 뒤 그는 경상도로 이주해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힘쓰며 교리 실천에 열중했다.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주거나 교리를 가르치면서 다시 순교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27년 정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상주로 끌려가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지지 않았다.

다시 대구로 압송된 그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1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39526(음력 414)이었고,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신태보 베드로

 

주리형

 

정해박해 때 체포돼 전주로 압송된 신태보는 주리를 트는 모진 형벌에도 결코 굽히지 않았다.

 

 

 

 

 

 

 

 

 

 

 

 

 

 

신태보(베드로 ?~1839)는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태어나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바르바라)가 며느리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후 용인 순교자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해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다 다른 교우들과 연락해 교회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경비조달에 힘을 쏟았던 그는 일이 뜻같이 되지 않자 경상도 상주 잣골에 정착해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교회 서적을 필사해 나눠주곤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후 그는 포졸들에게 붙잡혔고, 전주로 압송돼 고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옥중 수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해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지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이처럼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교우들을 밀고하지도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그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39529(음력 417)이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70살 가량이었다.

 

 

이태권 베드로

 

배교자의 고백

 

 

마음이 심약해 체포될 때마다 배교했던 이태권은 1827년 박해 때는 모진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전주에서 순교했다. 그림 탁희성 화백 (그림의 '선화''승화'의 잘못된 표기입니다.)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베드로, 1782~1839)은 충청도 홍성 양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전라도로 유배 갔다가 3년 후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이 아버지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은 삼촌이다.

이태권은 아홉 살 때인 1791년에 체포된 적이 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아버지와 삼촌, 형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그 이듬해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이처럼 그는 마음이 심약했으나 석방된 후에는 신자 본분을 계속 지켜나갔다.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던 그는 1827년 박해 때 다시 체포됐다.

전주로 압송된 그는 첫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다시 약해져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에는 혹독한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켰다.

이후 이태권은 김대권(베드로), 이일언() 등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에 의해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39529(음력 417), 그의 나이는 57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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