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부산을 통해 내려주신 하느님의 사랑

 

이정윤 유스티나 / 염리동성당

 

2016527, 아직 미혼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나의 동생에게 암 4기라는 청천 벽력같은 진단이 내려진 이후,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 온 가족의 마음은 짙은 암흑으로 휩싸였다. 여명이 앞으로 1년 반이라니!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성을 완전히 잃은 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방황하였다. 무작정 서울에 가서 가장 유명한 의사에게 의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 모 병원의 암전문의를 찾아 그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때의 우리는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동생을 위해 기도하며 돌보는 일에 각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어찌 본인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으랴. 돌아보건대 23번이라는 항암치료를 견디면서 동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으리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으로 육신이 닳아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태연함을 잃지 않고 가족들을 되레 위로하며 투병하는 의지를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 기도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감히 지금 각자의 마음속의 미안함과 슬픔에 내가 지금 가장 힘들다.” 얘기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우리 가족 모두는 기적을 바라며 많은 기대를 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암세포는 동생의 몸을 사정없이 빠르게 잠식해 버렸고, 20179월 초 우리는 의사로부터 마지막 선고를 들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15:34) 하셨던 예수님의 절규가 나의 말처럼 나오던 그 즈음, 하느님의 또 다른 인도하심이었는지 고마우신 분으로부터 대체의학 암 치료 분야에서 국제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한 이탈리아 의사를 소개받았으며, 이때부터 동생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돌아보건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으면 어찌 가능했겠는가 하는 얘기가 나올 만큼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뜻하지 않은 갑작스런 로마행 비행기에 동생과 함께 몸을 실으면서, 나는 차제에 우리가 바티칸에서 교황님을 뵙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이상하게 마음이 설렜다. 그 후에 체류하게 된 이탈리아에서의 열흘은 매일같이 간신히 눈을 붙여 쪽잠으로 휴식을 얻는 외엔 11초도 허투루 보낸 시간이 없을 정도로 혼신을 기울여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다.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의사를 만나서 시술을 받게 하고, 수많은 약국을 찾아다니며 앞으로 귀국해서 치료에 써야 할 다량의 약들을 간신히 다 구했으며, 천신만고 끝에 구입한 약들을 로마를 떠나야 하는 하루 전날 저녁에야 까다로운 운송법규를 헤치고 극적으로 우체국에서 한국행 택배로 보낼 수 있었다. 처음엔 사람의 힘으론 도저히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이 일들을 나는 오직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매달리고 분투하였다. 이렇게 일들을 다 마치고서야 비로소 나는 저녁 식사 후 열흘 만에 동생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테베레 강 위의 다리를 거닐며 짧지만 오누이의 사랑을 그 언제보다도 짙게 느끼는 가장 행복한 망중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드디어 해냈구나!’ 하는 생각과 뿌듯함으로 동생과 나눈 그날의 대화는 하느님께서 그를 믿고 온갖 성심을 다해 길을 찾아 나선 나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축복과 은총으로 느껴졌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7:7) 한 발짝도 힘겨워했던 동생도 그 순간엔 참 오랜만에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그날의 시원한 밤바람과 아름다운 강변의 풍경과 우리의 대화는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그 날의 기대와는 달리 이제 동생에게 허락된 시간은 거기까지였는지 귀국 후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동생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동생은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여명이 앞으로 일주일이라는 절망의 두 번째 선고를 받았다. 지금껏 하느님께서 동생을 돌보고 계신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기에 나에겐 갑자기 큰 배신감이 느껴졌고, 동생을 데려가신다면 어쩌면 다시는 하느님을 찾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자꾸 정신을 잃어버리는 시간이 늘어나는 동생을 보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나약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즈음, 내가 이 시점에서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 동생을 맡기며 동생에게 전대사를 받게 하는 것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26:39) 하셨던 처절한 순종의 기도를 생각하며,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께 속한다는 진리에 엄숙히 고개 숙이며 동생의 남은 생명을 위해 기도드리고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있었던 깨달음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 길로 나는 병원 지하에 있는 성당 사무실에 들러 빈 사무실에 비치된 가톨릭 부산주보를 보게 되었고, 조만간 병원 근처 성당의 신부님께 전대사를 부탁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문에 부착된 연락처를 보고 병원 담당 수녀님께 전화를 드려서 다음날 뵙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동생의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고, 급기야 동생은 코마 상태에 빠졌다. 그럴 즈음에 수녀님으로부터 동생의 얘기를 들으신 성모회장님께서 동생을 위해 기도를 해 주고 싶으시다며 병실을 찾아오셨고,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동생을 보시더니 망설임 없이 당신께서 차고 계시던 묵주 팔찌를 벗어서 동생 팔목에 채워주셨다. 코마상태에 빠진 동생을 처음 본 우리 가족은 모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새벽녘에 동생의 상황을 지켜보던 간호사 한 분이 내 팔을 끌더니 그날 아침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알려주셨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좀 더 일찍 동생이 전대사를 받도록 움직이지 않았던 나 자신을 후회하면서 지금이라도 받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계를 보니 새벽 5! 성당이 바로 병원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새벽 미사 후 신부님을 바로 모셔와야겠다 싶어 곧장 성당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성당 앞에서 성모님을 향해 기도드리며 동생에게 꼭 전대사를 받게 하고 동생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게 기도에 열중했으나 새벽미사를 준비해야 할 성당은 계속 어둠 속에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당 홈페이지를 통해 미사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런! 그날은 마침 새벽 미사가 없는 날이 아닌가! 갑자기 바빠진 마음에 신부님을 어찌 모셔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노심초사 하는 순간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그 전날 낮에 사무실에서 본 주보! 급하게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고 나의 절실한 기도가 통했는지 사무실은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고 주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6. 나는 신부님께서 한참 잠들어 계실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신부님과 반드시 통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떨리는 손으로 주보에 나와 있는 사제관으로 급히 전화를 했다. 몇 번의 신호가 울리는 그 시간이 나에겐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들려 온 여보세요?” 라는 신부님의 목소리는 나의 애타는 부름에 응답해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 성당의 신자도 아니니 상황이 이해도 안 되실 테고 나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셨을 텐데도 신부님께서는 더 묻지 않으시고 무조건 지금 가겠으니 기다리라고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의 입에서는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하느님께 절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는 단숨에 달려와 주신 신부님께서 유아 세례밖에 받지 않은 동생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대사를 주시고는, 동생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으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씀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셨는지, 동생의 삶이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음에도 내 눈에서는 감사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정확히 1시간 후 동생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30여 년간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냉담하셨던 부모님과 언니, 유아 세례가 전부였던 동생, 부산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던 누나인 나로 이루어진 가족을 찾아줄 이가 누가 있을까 생각되건마는, 하느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한 생명인 나의 동생을 위해서 끝없이 신자분들을 보내시어 동생을 위해 연도 기도를 드리게 하셨고, 마침 옆 장례식장에 들르신 미리내 성지 신부님께서 오셔서 동생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신부님 당신께서 늘 지니시던 묵주를 손에 쥐여주시고 가셨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동생을 위해 특별히 내리신 은총이라고 밖엔 어찌 달리 얘기할 수 있겠는가?

동생을 잃는다면 과연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계속 하느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는데 오히려 나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하셨으니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동생의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우리 가족 중 가장 어린 동생을 제일 먼저 데려가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매일 묵상하며 한층 더 깊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신앙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날 새벽 동생에게 극적으로 전대사를 받도록 이끄신 이 위대한 하느님의 사역자 가톨릭 부산이라는 주보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 이후 매주 성당에서 주보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언제나 살아있는 동생을 생각하며 말을 건넨다. “하느님 나라에서 편히 쉬고 있어. 이 누나가 네가 못다 한 일들 다 마무리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기쁜 마음으로 널 만나러 갈게. 기다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