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도정호 신부 / 장림성당 주임
세상을 창조하고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은 어느 한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아랍인, 유대인을 차별하고 구분하는 분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다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쉽게 설명해 주시고,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아픈 사람을 치유해주시고, 용서를 베풀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하고 인자하고 자비롭고 좋은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은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귀찮아하는 듯, 사람을 구분하는 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은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이 만난 시대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무시를 당했던 시대였고, 구원에서조차 제외된 것인 양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야기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기 민족이 아니면 (오늘 복음의 표현에 따르면) 강아지 취급을 했었던 시대였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과 대화도 하고 여인의 간청도 들어준 이 일은 그 시대의 상황을 참고로 한다면 당시 사회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신 셈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사고의 틀을 깨고자 하신 듯합니다. 사람들은 편을 가르고 자기 민족과 다른 민족을 구분 짓고 있지만, 하느님 당신께는 모두가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하느님 당신께는 모두가 구원하시려는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이니까 챙기고 가나안 사람이라서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고 계시는 겁니다. 가나안인, 유대인 구분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무시하고, 힘이 없다고 무시한 것은 같은 사람이었지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는 차이가 없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시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