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지 못한 부자보다 선택받은 라자로 같이
김성한 안드레아 신부 / 우정성당 주임
오늘 복음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와 라자로가 왜 가난하고 부유한 입장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단지 물질의 풍요 속에 삶의 사치에 빠져서 하루하루 감각적으로 즐기고 있는 부자와 인간의 기본적인 생계유지조차도 못하는 가난한 라자로의 생존 모습만이 표현되고 있다. 이 땅에서 부자는 비단으로 온몸을 감싸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거지 라자로는 개만도 못한 무기력과 비참한 상황 속에서 고통 중에 살았다. 죽고 난 다음에는 상황이 바뀌어 지상에서 가난과 고통 가운데 살던 거지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행복과 평화를 누렸지만,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아쉬운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가난한 라자로가 자신의 가난 때문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이 아니듯이 부자 역시 자신의 부유함 때문에 몰락한 것은 아니다.
복음 말씀에서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자신의 특별한 죄가 있어서도 아니고 어떤 악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자비롭지 못하고 이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부자가 죽어서 고통을 받은 것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부자는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 42 참조)는 주님의 공심판의 가르침을 아예 외면했다. 결국 부자가 라자로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라자로에 대하여 무관심했다는 사실은 바로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부자가 이 세상의 고통과 가난을 방관하고 이웃의 아픔과 불의를 외면한 태도는 바로 이웃 사랑을 거부한 죄가 된다. 이 죄 때문에 부자가 하늘나라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반면에 라자로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은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예수님 복음 선포의 핵심은 사랑과 자비이다. 사랑과 자비는 구체적 나눔의 실천을 요구한다. 나눔이 없는 사랑은 허상이고 실천 없는 자비는 위선이다.
재물이나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게 된다. 결국 세상살이의 결핍과 부족은 삶의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문임을 알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이웃과 나눌 수 있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의지하며 바라보고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