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하고 가혹한 사랑
이성균 예로니모 신부 / 성바오로성당 주임
때론 어떤 사랑이 의심받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삶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대와 세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사랑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노래로 불리고 행복과 불행을 빚어내는 동기가 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돈이 있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는 요즘의 ‘사랑’과 요한의 ‘사랑’이 같은 말일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동기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말로써 자신의 복음을 시작한 요한은 예수님을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으로 그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요한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를 되새기며, 우리가 나누는 서로의 사랑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언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에게 ‘사랑’은 또한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의 그 지극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영상매체와 쇼비즈니스에 익숙한 우리가 기대함 직한 볼거리로서의 광채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일깨워 주어 삶을 밝혀주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요한이 전하는 그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열정이 아닌 (도로시 데이의 말처럼) ‘고단하고 가혹한’ 행동입니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그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은 절망하거나 저항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도 가끔 묻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걸까요?” 이 물음을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그 가치는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외로운 일이지만 사소한 일상조차도 사랑으로 채우려 부단히 노력했던 도로시 데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오늘의 우리는 어떤 확신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