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는 이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약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도 더 큰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다음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에 울상이 되어 떠나가 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가 울상이 되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어놓을 수 없음’ 때문이었고, 내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실까?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함은 단순히 죽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유에서의 떠남’을 요구하신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구원의 역사 안에서 신앙의 성조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 자신이 누리던 특권, 자신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떠남’과 하느님을 향한 ‘투신’이 있었기에 신앙의 성조가 되었고,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이 세상에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기에 ‘소유’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전적인 투신’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가능한 일이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는 이들에게는 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능력, 내가 가진 재물, 내가 가진 안락함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 나를 울상 짓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을 향한 첫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