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눈과 귀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세상에는 사람을 눈멀게 하고 귀먹게 하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 권력, 명예가 그러하며 지위와 향락 따위의 욕망이, 또한 사람을 눈멀고 귀먹게 할 뿐만이 아니라 입조차 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마비가 되고 만다.
그렇게 몸과 마음과 영혼이 마비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반벙어리, 귀먹고 말더듬는 이다.
그는 들을 수도 없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마음을 닫은 채 나날을 보냈다. 그야말로 닫힌 세상에서 괴롭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가 오늘,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고 새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를 하시되 단지 육신의 장애만 치유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의 정신도, 영혼도 말끔히 치유되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주님!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를 따로 데리고 가서 당신의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시고, 병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또한 환부를 직접 어루만지시어 상처받은 영혼도 함께 치유시켜 다시 사랑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시며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시듯 한숨을 쉬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깊은 심연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에파타’-열려라 하고 외치신다. 태초에 세상이 열리듯이 우리를 닫힌 모든 것에서 열리도록 하셨다. 우리의 하느님 첫 체험이 해방과 자유였듯이(파스카 사건), 배타와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의 벽, 자기 재물, 자기주장, 자기 명예에만 관심을 쏟는 그 답답함, 스스로 자초하여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이 되려하는 그 풍토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신다. 우리가 신앙하는 참된 이유는 나의 행복을 넘어 너와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 듣지 못하는 마음을 치유하여 잘 듣게 하려는 것도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함이며, 내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 잘 보게 하려는 이유도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에파타’하고 말씀하러 오신다.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어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을 말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다. (마르7,31-37)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참 삶의 길을 보는 눈과 귀가 열리기를 참으로 소망하는가? 내 것을 내려 놓고 사랑하는 길,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