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공소 100주년
김정렬 모세 신부 / 부산교구
작년 12월 16일 언양본당의 순정공소 100주년 기념미사가 있었다. 1860년경 교우촌을 이루었고 1913년 12월 16일 당시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안주교께서 이곳 공소를 방문하시어 축복하셨다. 이후 순정공소는 천주교 부산공교 협회(지금의 교구 평협)가 피정을 했고, 선교사들의 휴양소로도 이용되었다. 1958년 아랫마을에 길천공소를 분가할 정도로 번성하였던 공소는 울산에 공단이 조성되고 70년대 산업화의 영향으로 도회지로 대거 이사를 하면서 이제 몇 가구의 신자만 남은 초라한 모습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어린 시절을 추억해보면, 공소 교우들은 사순시기에 매일 저녁 성로신공(십자가의 길)을 바쳤고 성탄과 부활 때 본당에서 개최하는 성가 경연 대회를 위해 함께 성가 연습과 장기자랑을 준비했었다. 지금은 사순시기 금요일에 본당에서 하는 십자가의 길에 열심한 신자들만 참여하지만 당시 공소회장이셨던 알퐁소 할아버지는 매일 바치는 성로신공에 빠지는 교우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초대교구장 최재선(요한) 주교님의 형님이셨던 안당 할아버지(최현욱 신부의 조부)는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으셨지만 매일 오후 손자를 앞세워 공소로 직접 가셔서 성로신공을 바치는 열성을 보이셨다. 이런 공소의 분위기로 한국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인줄 알았는데, 초등학교에 갔더니 우리 동네 이외에는
거의 신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순정공소 출신의 성직자는 최주교님을 비롯 7명인데, 당시 동네 어른들은 남자 아이들에게는 모두 신부가 되라 권고하셨다. 한 번은 최주교님이 공소를 방문을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방문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공소의 남자아이들 모두에게 당시 최고액권인 100원짜리 지폐를 나눠 주시며 공부 열심히 해서 신부가 되라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돈은 저금이라는 명목으로 부모님께 빼앗겼지만 사순시기 성로신공의 공덕과 최주교님의 물적 회유(?)로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싶다.
요즘 쉬는 교우들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앙의 힘보다 세속의 가치가 더 크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된다. 미사 중에 대리구장님께서도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을 잘 키우고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구교우(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의 신자) 중에서도 신앙을 버리고 세속의 가치와 잣대로 사는 이들도 많다. 나는 구교우들을 만날 때 마다 선조들이 물려준 신앙을 잘 간직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라 말한다. 그리고 친지들에게는 우리가 밥 먹고 별 탈 없이 사는 것은 선조 신앙인들의 음덕이니 자녀들이 성공해서 잘 살기를 원한다면 돈이 아닌 신앙을 물려 줄 것을 말한다. 순정공소 축복 100주년 미사를 통해 우리 선조들이 목숨 바쳐 물려 준 신앙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잘 깨닫고 살 것을 다짐해 보았다.